그녀와 주고받는 메시지, 수화기를 건너오던 그녀의 목소리로, 시간의 벽에 핑크빛 도배를 마쳤다. 그중에도 가장 분홍에 물드는 시간, 금요일 퇴근 무렵이었다.
생전 받아본 적 없는 '회사 앞 마중'이라니. 결혼 삼 년차 과장님께 이런 경험 있냐며 자랑하듯 묻고 싶었으나, 짖궃은 면박과 함께 퇴근이 늦어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으므로 튀어나오기 직전의 말을 삼켰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1층 유리문을 나서자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우리 인사동 가서 밥 먹자!"
각자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통의 거리 인사동이 있었고,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잔뜩 신이 난 상태로 사람들 틈에 섞여 들었다.(행여나 놓칠까 봐 잡았던 손을 좀 더 꼭 쥔 것은 물론이다.)
발길은 쌈지길로 흘러 재미있는 물건들, 신기한 그것들, 탐나는 그것들을 두리번대다가 이번엔 작고 아기자기한 액세서리 가게로 들어갔다.
겨우 내 새끼손가락에나 들어갈 크기의 작은, 플라스틱 재질의, 빛나는 알이 있을 자리엔 앙증맞은 토끼가 그려진 반지를 그녀가 집어 들었다.
"우리 이거 사자! 커플링!"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고, 결국 그녀의 손엔 흰 토끼, 내 손엔 검은 토끼가 끼워졌다.
비싸고 고급스럽지 않아도 좋았다. 이렇게 그녀와 나눌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로 충분했으니까.
이번엔 긴 백발을 풀어헤친 채 커다란 붓으로 서예를 하는 예술가를 만났다. 구경꾼들이 제법 모여들자 그 예술가는 큰 목소리로 소리치며 붓을 휘갈긴다.
"애정(愛情), 이토록 아름다운 마음이 또 어디 있으랴!"
그리고 손바닥 전체를 먹에 적셔 인장을 찍어내고 나니 하나의 작품이 완성됐다.
"햐- 오늘 글씨 자알 써졌다! 애정을 가진 분께 이 작품 드리겠습니다!"
괴상한 말투의 예술가 아저씨가 소리치자 너도 나도 손을 들었고 결국 작품은 어린 꼬마 아이에게 돌아갔다. 이런 광경들이 너무나 신나고 근사했다.
사실 인사동 이곳저곳에는 헤어진 그 사람의 흔적들이 묻어있었는데, 신기한 일은 그 흔적들을 마주하더라도 마음이 썩 괜찮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건 내 옆에 선 그녀가 솔향기처럼 싱그럽고 예쁜 기억을 새롭게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렇게 도처마다 다정하고 따끈 거리는 기억들을 덮어두고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 아깐 네가 마중 나왔으니 이번엔 내가 데려다 주겠다며 그녀가 내리는 정류장에 함께 내렸다. 곧장 헤어지기가 아쉬워 편의점 앞 테이블에 맥주 한 캔씩을 놓고 앉았다.
"캬- 오늘 진짜 재밌었다. 그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토끼를 만지작대며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말했다.
"응, 나도 정말 좋았어, 커플링도 사고 말이야!"
그녀 역시 흰 토끼를 내밀어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녀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 길지 않은 몇 시간이었지만, 치열하게 행복했다.
퇴근 후의 시간이 이렇게 말랑거렸던 적이 있던가. 매일의 귀갓길마다 소주 한 병을 마치 준비물처럼
사가지고 들어가던 내가 아니었나.
일순 장자의 '호접지몽'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로
나는 지금 행복의 정중앙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