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직장인들의 비애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법적으로 보장된 '내' 휴가를 사용하는 데에 왜 상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런 눈치도 없이, 너무도 당연한 듯이 쉴 수 있는 날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예비군 훈련'
그리하여 아침부터 성남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을 방문했는데, 사실 이 곳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곳이다. 오만 촉광의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달고 예비군들을 호령하던 내가! 예비군이 되어 돌아오다니.
아직 부대에는 나와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이건 뭐 훈련이라기보다 졸업한 학교에 다시 찾아간 기분이었다. 당시에 지휘했던 소대원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예비군들을 인솔하던 조교 병사의 모습을 보며 내가 여기서 누군가의 리더였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비록 군에서 나와 사회 생활을 하고 있지만, 분명히 그때의 경험과 기억은 나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이끌어간다는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치열하던 내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 추억에 빠져 있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그 기분 좋은 시간은 안타깝게도 순식간에 끝나버리지만. 퇴소를 하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쯤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회식이라..'
워낙 성격이 둥글고 유들 거리는 사람이라 술만 잔뜩 마시게 될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술 적당히 마셔!!]
아무래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 흘려 말했던, 그녀에게 집적거리는 (그지 같은) 대리 때문에 더더욱.
도저히 안 되겠어서 회식한다는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신입사원이 첫 회식자리에 남자친구를 불러내는 그림이 영 보기 안 좋을 것 같아 포기하고 만다.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여덟 시, 저녁을 먹고 청소를 했더니 아홉 시, 그 사이 그녀는 2차로 자리를 옮겼단다. 유난스러울까 봐 혹은 부담스러울까 봐, 그녀에게 연락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지만 불안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열 시.
그녀가 발송한 문자가 도착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문자에는 평소에 잘 내지도 않던 오타가 가득했다.
"동네 오면 안 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골목 입구에 내려, 편의점 앞에 있을게."
곧장 전화를 걸어 나가겠다고 했다.
오 분쯤 기다렸을까.
그녀를 태운 택시가 도착했고, 택시기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뒷 문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은 적당히 취해 보였고, 역시 적당한 정도의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온통 걱정으로 가득했던 마음은 곧 안심으로 바뀌어 그녀를 곧장 집으로 돌려보내기가 아쉬워졌다.
"안 되겠다. 술 깨는 약이라도 먹고 가자."
물론 그녀의 술 취한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사실은 조금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술 깨는 약 하나를 산 뒤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그네에 앉혀두면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마음에 내 무릎 위에 앉혀놓고 약을 먹였다. 그리고 나를 안으며 눈을 감는 그녀.
공기는 차고 그녀는 따뜻했다. 놀이터엔 적막이 흘렀고, 하얀 가로등 빛 만이 가득했다.
그녀와 맞대고 있는 내 심장이 격렬히 두근대기 시작했으며, 이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내 품에 안겨있던 그녀를 불렀다.
"사월아."
그리고 곧 내 마음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생각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며 매끈한 입술이었다. 약간의 술냄새는 오히려 나를 그녀에게 취하도록 만들었고, 그녀의 숨소리는 내 귀로 흘러 상상력을 자극했으며, 서로의 입술이 스치는 감촉은 결국, 그녀를 더 세게 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얀 가로등 빛이 예뻤던 놀이터에는, 종소리 대신 그네 줄 삐걱대는 소리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