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단지 내가 조심해야 할 주의사항 정도를 듣고 싶었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남자의 폭력성, 그리고 공포.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공포심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무섭고 두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마음 깊숙한 그 어느 곳에 남아, 남자의 작은 액션에도 매우 민감하고 날카롭게 반응할 것이다.


아픈 상처나 트라우마 정도로 설명할 수 있었던 그녀의 지난 일들을 절대로 잊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공포나 두려움 따위가 그저 그 깊숙한 곳에서 먼지에 쌓여 다시는 드러나지 않도록. 말랑말랑하거나 알록달록한, 두근거리고 설레는 감정들에 밀려 다시는 보이지 않도록.


그녀는 최대한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마쳤고, 이제는 내가 질문을 받을 차례.

그리고 그녀의 질문은 내 나름의 민감한 구석을 찔렀다.


"왜 헤어졌어?"


사실, 오래 만나던 친구와 이별을 하게 되면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물어오는 것들 중 하나인 질문.

그러나 "왜?"라는 질문의 범주가 매우 커서 하나의 명확한 이유로 설명하기에는 자주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음... 지쳤을 거야 그 친구가. 어릴 때부터 만났고, 그때와는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그러던 과정에서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리고 어느 순간 맥이 풀렸겠지. 그래서 그 친구는 나한테 이별을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고, 난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헤어지던 그 날, 이유를 묻지 않았었기 때문에 정작 나 역시 "왜?"에 대한 정답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막연히 '이랬을 거야-'라고 추측하는 것뿐.


"사실 나도 잘 몰라. 그냥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워낙 속을 많이 썩혀서... 그래서 난 앞으로 연애나 결혼 같은 것들은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어. 아주 오랫동안 내 옆을 지켜준 사람도 떠나보낸 주제에 다시 사랑 같은 거 하면 안된다고, 더 외롭고 더 혼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다가 널 만나게 됐고 처음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서 더 노력하고 싶어. 너한테 느꼈던 첫 감정들부터 지금까지, 전부 지키고 싶어. 다시는 같은 후회 하고 싶지 않거든."


말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혹 내 이야기가 그 친구에 대한 미련으로 비치지 않을까 싶어서.


"아 오해는 하지 마! 절대 미련이 남거나 한건 아니니까. 그냥 지나간 내 못난 모습에 대한 반성 정도로만 생각해줘."


이야기를 마치고 멋쩍게 웃었다.

"이거 되게 고해성사 같은 거 한 기분이네."


다시 그녀가 말했다. 다시는 사랑 같은 거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겪었던 일은 다르지만 사랑을 막아놓았던 감정은 나와 같았다. 그러다가 날 만났다는 그녀. 이러다가 그녀를 만났다는 나.


사랑하지 않기로 했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사랑'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좋음에서 비롯된, 서로를 그리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분명 사랑을 시작하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더 차가워진 바람이 불었고, 조금 전보다 더 따뜻해진 몸으로 그녀를 안아주었다.


분위기를 전환하며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그녀가 말했다.


"맞다 찰스야! 나 이번 주말에 부모님 댁에 내려갔다 와야 해."

맞아, 이 여자 부산 사람이었지. 평소에 경상도 사투리나 생활습관이 보이지 않아서 부산 여자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는데, 고향에 내려간다고 하니 왠지 나도 따라가 보고 싶었다.


"그럼 나도! 나도! 나도 갈래!"

기어코 따라 내려가겠다는 나를 말릴 수 없었던 그녀가 결국 오케이 했다.


"그럼 토요일날 내려와. 나 먼저 내려가서 부모님 하고 하루 보낼 테니까."


"당연하지! 얼마만에 내려가는 건데, 부모님 하고 시간 보내야지! 난 그냥 자기네 동네 구경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다소 느닷없는 타이밍에 나온 부산 이야기. 시간이 늦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에 돌아가는 그 길 내내 부산 이야기만 해댔다.


예정에 없던 여행은 역시나 설렘 가득한 일이었고, 고작 며칠 앞으로 다가온 부산행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이 났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었던 탓이겠지. 다시 한 번 지겹고 지루하던 내 일상으로 들어와준 그녀에게 감사하며, '부산에서는 땅콩을 삶아 먹는다는데 그게 사실이냐'는 등의 '경상도 Q&A' 시간을 가졌다.


기억해야 할 대화가 많았던 하루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된 하루가, 그렇게 둘의 웃음소리로 마감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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