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우중충한 비구름이 잔뜩 몰려와 한 낮인데도 꽤 늦은 시간처럼 어두웠다.


"연휴인데 어디 안가냐?"
"아, 당연히 가지요! 부.산."


한참을 졸던 중이었는데, 부산여행을 생각하니 내 눈꺼풀 위에 있던 잠들이 순식간에 도망쳤다. 이미 출근하자마자 버스 예매를 마쳤고 부산에 도착하면 먹을 음식, 유명한 곳 등을 찾느라 일도 못한 채 오전 시간을 보낸 후였다.


그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아마 부모님과 마트에서 장이라도 보고 있지 않을까. 부산까지 언제 내려가냐며 귀찮아하던 그녀였지만, 분명히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애인 유무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럼 그녀는 내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일 부산에서 만나기까지 하는데.


'아마.. 내 얘기하겠지? 잠깐이라도 인사를 드려야 하나? 너무 이른가? 아냐, 그래도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지.'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집에 돌아오는 그 길까지 난 김칫국을 항아리째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김칫국에 적당히 취해갈 때쯤 그녀로부터 정신이 번쩍 드는 전화가 걸려왔다.


"선?"

벌써 '선'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정도의 나이가 되었었나. 한동안은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가 하는 말을(정확히는 그저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도 모르고 '인사를 드리네 마네.' 하고 있었으니. 허허. 먼저 말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내 머릿속에 맴도는 키워드는 '부산사람, 일본에서도 근처에 지낼 사람, 어머니의 권유'


평소 '뭐 선이 별거야. 그냥 소개팅이지.'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거 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어머니는 외국에 나갈 딸이 걱정되었을 테고, 그 타국에서 딸을 지켜줄 남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겠지. 거기에 남자 쪽 조건까지 맞는다면 금상첨화. 즉, '결혼'이다.


애초에 그녀와의 시작은 우발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며, 시작부터 그녀는 나에게 '3개월'이라는 제한을 두었다. 내가 거기에 동의하면서 일종의 계약연애가 시작된 것인데, 이제와 내가 그녀의 '진짜' 연애나 결혼을 방해할 자격이 있을까.


이것은 그녀가 나에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계획하지 않았던 타이밍에 어거지로 3개월이라는 틈을 파고 들어온 내 탓이지.


다소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고, 실제로 내 판단의 과정은 꽤나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어.. 그래..! 잘 다녀와. 그럼 내가 점심 지나서 도착해야겠다. 그치? 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일본 가서 알고 지낼 사람이라고 생각해. 가까이에 너 도와줄 한국 사람 있으면 좋지 뭐!"


분명히 합리적인 생각을 마친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달리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고 그 마음을 드러내듯 입에선 생각의 과정을 생략한 말들만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흔히들 '쿨한 척한다.'고 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내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쿨한 척이라기보다, '속 좁은 찌질남이 되고 싶지 않다.'는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전화를 끊고, 열두 시 도착이던 버스시간을 다섯 시로 바꿨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냈고, 불을 붙였다.


'후.. 선이라..'


다음 날.


어제 저녁 전화를 받기 전까지, 딱 거기까지 가졌던 그 신나는 마음과 설렘들이 한풀 꺾여 있었다. 여전히 합리적인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터미널로 향했다. 지금쯤 그녀가 상대방을 만나 차를 마실 시간이라 출발한다는 연락은 하지 않았다. 이 또한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버스에서는 잠을 잤고, 휴게소를 한 번 들렀고, 다시 잠을 잤더니 부산이란다. 그리고 잔뜩 눌린 머리를 정리하며 플랫폼으로 나갔다.


"찰스! 여기!"

저만치에 손을 흔들며 폴짝거리는 그녀가 서있었다. 여전히 예쁜 웃음으로 날 맞아주었음은 물론이다.


"어디 갈까! 뭐 먹고 싶어!? 부산까지 왔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평소보다 약간 상기된 목소리의 그녀는 아주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한정식 집으로 날 데려갔다.


"여기 음식 되게 깔끔하고 맛있어. 회도 아주 싱싱하고. 얼른 먹어봐. 맛있지? 맛있지?"

"나 오늘 만난 사람한테 한 번도 안 웃어줬다? 잘했지! 나 빨리 칭찬해줘."


내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는지, 그녀는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사실 화가 나거나 엉망인 기분이라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유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그녀에겐 그게 보인 모양이다. 괜스레 그녀에게 미안해졌고 내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다.


"애쓰지 않아도 돼. 다 인정하고 있어. 내가 끼어들 부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너도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니까 내 눈치 보지 마. 괜찮아."


"음.. 나 멀리까지 온 거니까 이제 심각한 얘기 그만하자!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우리 밥 맛있게 먹고, 나가서 재밌게 놀자!"


그리고 곧 화제를 바꾸며 우리는 평소와 같이 웃을 수 있었다.


"다음 코스는 어디입니까! 강사월 가이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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