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보다는 조금 더 차오른 달이 기다란 다리 위 조형물 끄트머리에 걸릴 때쯤 광안리 해변가에 도착했다. 내내 도심의 매연 가득한 공기를 들이쉬다가 바다의 짠내가 폐 깊숙이 들어오자, 막혀있던 무엇들이 쑤욱- 하고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출발했을 것 같은 파도가 비로소 잦아드는 해변 가장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던 광안대교를 내게 소개했고, 양 옆에서 폭죽을 터뜨려대는 연인들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그 매캐한 폭죽 연기에 코를 움켜쥐고 찡그리기도 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차분한 피아노 선율과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해변에서의 버스킹.
넘치는 낭만을 참을 수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몰려있던 그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아티스트'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던 젊은 여자 가수였는데, 우리가 가까이 갔을 무렵엔 아주 쓸쓸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쓸쓸함은 노래가 끝난 뒤에도 여운을 남겼고, 남겨진 여운은 '갈까?'라고 말하던 그녀의 말에도 발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노래를 마친 그녀는 여전히 맑은 목소리와 말투로 관객들에게 신청곡을 받겠다 했다. 앞선 두 명의 신청자들이 각각의 이유로 거절당하자 무심코 손을 번쩍 들었다.
"에피톤 프로젝트!!!"
그녀의 피아노 연주와 잘 어울릴 것 같아 평소 좋아하던 에피톤 프로젝트의 곡을 신청했는데, 마침 가수의 지인이 신청곡에 직접 참여했었다는 스토리를 말하며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아주 부드럽던 피아노 소리의 움직임, 깨끗하고 맑은 발성, 그리고 바람과 파도소리. 고맙기 그지없는 그 아티스트의 노래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이 밤을 별처럼 예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자리에 앉아 가슴 가득 낭만을 채운 다음 근처 펍에서 칵테일을 한 잔 하기도 했는데, 그녀가 물어왔다.
"근데 찰스, 어디서 자?"
내심 응큼한 생각을 품기도 했지만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질문에 나름 자연스러운 투로 답했다.
"뭐 그냥 사월이 동네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자면 되지. 그래야 내일 다시 만나기 편하잖아."
"흐음... 정말 괜찮겠어? 신경 쓰이는데..."
"신경 쓰이긴, 늦으면 부모님 걱정하실 거야. 얼른 들어가자."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그녀의 동네로 가는 41번 버스를 탔다. 나란히 앉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 오는 그녀. 내가 어느새 그녀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아주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린 뒤 그녀는 나를 모텔로 안내했다.
"이제 들어가, 혼자 잘 잘 수 있지?"
"내가 뭐 애기냐. 저 앞까지만 데려다 줄게."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 골목 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말았다.
(집 근처에서 부모님께 보이기라도 하는 날엔 나를 오늘 만난 맞선 상대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돌아오는 길엔 타박거리던 발걸음 소리만 가득했고, 혼자서 잠들기에는 쓸데없이 넓었던 더블 베드 위에 누워 꽤 오랜 시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 다시 만난 그녀는 어제보다 더 예뻐진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어젯밤 그녀가 간절하긴 했던 모양인지, 만나자마자 그녀를 껴안은 채로 말했다.
"내가, 어? 그 넓은 침대에서, 어? 혼자! 어!?"
투정 부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가 말했다.
"어이구, 외로웠어요 우리 찰스~"
그렇게 사랑이 백 퍼센트로 채워진 둘째 날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남포동으로 향했다.
마침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기간이라 그런지, 사람으로 메워진 그 거리는 흡사 서울의 명동과 같은 풍경이었다. 평소 부산하면 떠오르던 음식은 밀면과 씨앗호떡. 부산에 오면 꼭 먹고야 말겠다며 그녀에게 말했었는데 그 소망을 남포동에서 이룰 수 있었다.
음식에 대한 환상은 대개 입에 넣고 몇 번 씹는 순간 시큰둥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녀와 함께 먹은 그것들은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게다가 시장 골목에선 의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것에 앉아 비빔당면이라는 음식을 먹기도 했는데, 여태 먹은 당면 요리 중 단연 최고였다.
아쉽지만 짧았던 휴가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시간, 서점을 응시하던 그녀가 책을 선물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도 그녀에게 책을 주고 싶다는 충동이 심장을 들썩였다.
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에세이 코너로 발을 옮겨 제일 좋아하는 책을 집어들은 반면, 그녀는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르느라 꽤 심사숙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결국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황경신 작가의 책을 골라냈다.
"책 선물할 때는 맨 앞장에 메시지를 적어서 줘야 해. 그래야 이 책을 볼 때마다 내 생각을 하지."
그리고 그녀는 개나리색 속표지에 예쁘장한 글씨로 사랑을 담아 내게 건넸다. 분명히 짧은 세 줄 속에 담긴 것은 사랑이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약간 서운하기도 했었던 내 마음이 그곳으로 가는 길엔 온전히 사랑을 채워 돌아간다.
우리가 함께 들었던 노래에, 같이 먹었던 음식에, 서로 나누던 책 속에, 온통 사랑이 넘쳐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