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각- 딸각- 딸각-
"야, 너 그 볼펜 가만히 좀 안 놔둬?"
"아, 네 죄송합니다 과장님."
볼펜 뒤꼭지를 눌러대는 소리에 신경이 거슬렸던 모양인지 과장님께 한 소리를 들었다. 간신히 참고는 있지만 내가 이렇게도 불안 증세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아프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출근길에 그녀에게 문자를 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회신은 평소와 같지 않았다.
[찰스.. 나 아파... 회사 못 가겠어...]
얼마나 아파서 회사도 못 갈 지경인지 당장에라도 뛰어가 그녀를 들쳐 업고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기에는 내가 너무 계산적이었다.
'빌어먹을 날씨는 왜 이렇게 갑자기 추워져서는!'
속상한 마음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날씨 탓 밖에 없었다.
시간마다 밖에 나가 담배를 태우고, 돌아와선 시간 내내 한숨을 쉬어대는 작업을 무려 여덟 시간 동안 했다. 아침에 달려가 주지 못한 게 미안해서 방 안에서 내내 외로워할 그녀에게 너무 미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퇴근시간. 인사 따위 할 새도 없이 뛰쳐나가 회사 앞 죽 가게서 미리 주문해둔 송이 전복죽을 챙겨 들고 택시를 잡았다.
"성북동이요!"
지난번 데이트 때 집을 알아두길 천만다행이었다. 곧 택시에서 내려 집 앞까지 뛰어가는데 과일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비타민, 비타민! 감기에는 비타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비타민 덩어리처럼 생긴 귤과 어디에든 좋을 것 같은 사과들을 한 뭉텅이 집어 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헐떡이며 문 앞까지 도착한 나는 그녀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띠리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는데, 안쪽으로부터 빛이 약간 새어나올 뿐 내부는 아주 어두운 편이었다. 그리고 몇 발짝 지나지 않아 누운 채로 쌕쌕- 대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왔어..? 나 생얼인데.. 이상하지.."
"지금 그게 중요해? 밥은."
"못 먹었어.."
"잠은."
"자다 깨다 해.."
"병원은."
"힘이 없어서 못 갔어.."
"어휴.. 일어나, 죽부터 먹자. 너 빨리 나으라고 제일 비싼 거 사왔어. 못 먹는다 그럼 혼난다."
힘이 없다는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땀에 푹 젖어있는 그녀의 향은 애처롭고 외로운, 그러나 여전히 사랑스러운 향이었다.
아파서 입 안이 말라 있을걸 알지만, 억지로 죽을 떠먹였다. 뭐라도 속에 넣어야 약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몇 숟갈을 떠먹인 뒤 약을 먹였고 다시 그녀를 눕혔다.
"우리 집에 처음 온 소감이 어때? 좀 엉망이지..?"
누워있는 그녀가 신경 쓰인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제서야 둘러본 그녀의 방은 옷가지들이 조금 어지러웠고, 식탁 등이 약간 번잡스러웠다. 그러나 아픈 사람의 집에서 그것들이 다 무슨 상관이랴. 그녀의 집에 처음 왔다는 설렘 따위 생기지도 않았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하나도 안 엉망이야! 몸 생각이나 해.. 어지러우니까 눈 감고 있어. 나 정리 좀 하고 올게."
"응.. 고마워.."
여전히 말에 힘이 없는 그녀가 눈을 감았고, 곧 잠에 든 것 같았다.
그사이 빠르게 집 안을 정리했다. 널려있던 옷을 개고 쌓인 설거지를 했으며, 걸레에 물을 적셔 먼지들을 닦아냈다. 이번엔 찬물에 적신 깨끗한 수건을 가지고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땀에 흠뻑 젖어있는 그녀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마부터 목에 수건이 닿자 찬 기운에 잠에서 깬 그녀가 흠칫 대고 있었다.
"열나니까 좀 식혀야 돼. 땀도 좀 닦고. 몸 닦고 나면 옷도 갈아입자. 야한 생각하지 마! 나 절대로 너 낫게 해주려고 하는 거니까!"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였을까. 그녀가 힘 없이 웃었고, 난 다시 그녀의 얼굴에 수건을 가져갔다. 그 다음으로 그녀의 윗 옷을 벗겨 어깨와 가슴, 배를 지나쳤으며 식은 수건을 다시 찬물에 적셔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닦아냈다. 수건이 그녀의 몸에 닿을 때마다 그녀의 낮은 신음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러다 보니 나도 사람인지라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녀의 살결이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추워서인지, 아니면 부끄럽기 때문인지 몸을 떨고 있었다.
'안돼, 안돼.'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 깨끗한 옷을 가져와 그녀에게 입혔다.
"조금 개운해졌어.."
분명히 아까보다는 기운이 들어가 있는 투로 그녀가 말했다.
"그래? 다행이다... 귤 사왔는데 좀 먹어볼래?"
"응, 까 줘."
귤을 까달라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이제야 안도감이 몰려왔다.
"맛있어? 귤이 감기에 좋다더라. 조금 더 먹어봐."
"응, 더 줘."
'후... 이제 살겠네..'
"벌써 열두 시네.. 그래도 나 잠들면 가.. 무서워.."
하루 종일 무서웠을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응. 너 자는 거 보고 갈게. 얼른 다시 자."
역시 그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답했고, 남은 한 손으로는 이마를 쓰담으며 그녀가 잠에 드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녀는 이미 잠에 들었는데 마주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아졌다. 그저 그 뿐이었다. 그 손을 도저히 놓고 싶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손을 잡은 채 그녀의 곁에 누웠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손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보낸 밤은 서로의 손이 따뜻했던, 그녀의 숨소리가 다정했던,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