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하루 한 시도 아까운 요즘 같은 때에 출장이라니. 조직 개편 컨설팅을 맡긴 업체가 부산에 있다는 이유로

함안에 있는 공장에서 미팅이 잡혔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 버스에 몸을 실었고 시계 바늘이 동그란 운동장 네 바퀴를 힘겹게 완주할 무렵, 경상남도 함안에 도착했다.


'무슨 미팅 몇 시간 하자고 여기까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불평을 잔뜩(속으로만) 늘어 놓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사방으로 트여 있는 시골 특유의 가을 풍경이 예뻤다는 것쯤일까.


예정보다 일정이 지연된 탓에 미팅은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 끝이 났다. 그리고 이어진 저녁 식사. 사실 식탁에 올려진 것은 밥보다 술이 더 많았으므로 회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본래 본사에서는 회식 자체를 잘 하지 않을뿐더러 해봐야 술도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인데, 공장 쪽은 문화가 좀 다른 모양이었다. 다들 어찌나 술을 마셔대는지 맞은편의 여사원 역시 잔에 가득 찬 맥주를 벌컥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하.. 이 시간에 사월이랑 치킨을 먹고 있었다면...'
그녀를 그리던 차에 마침 그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찰스 뭐해? 일은 다 끝났어?]

[그럼, 일 끝나고 직원들하고 회식하는 중이야ㅜㅜ]

[그래? 재밌게 놀고 있어?ㅋㅋ]

[재밌긴ㅜ 사월인 뭐하고 있어?]

[난 그냥 쉬면서 빵 먹고 있지..

잠깐, 그럼 거기 여직원들도 있겠네?]

[그럼 있지 ㅋㅋ 왜ㅋ]

[오호.. 재미 좋구나? 좋아 보이네 아주?]


여직원도 함께 있다고 하니 그녀가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적당한 정도의 질투는 사랑을 더욱 타오르게 한다고 했던가. 그녀의 질투는 아주 귀여운 소녀의 그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어이구 우리 사월이 질투하는구나아~??]

[아니거든 아니거든? 흥! 재밌게 노셔!]

[미안ㅋ 끝나고 숙소 들어가면 바로 연락할게♡]

사실 여직원이라고 해봐야 회사 동료와 결혼한 사람 한 명뿐이었는데, 구태여 그것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의 질투는 조금 더 받아도 좋겠다 싶었으니.


무튼 먼 곳에서의 메시지 조차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시간은 점점 늦어만 가고, 지쳐가는 시곗바늘만큼 내 체력 또한 방전될 즈음 드디어 회식이 끝났다. 공장에 직원들이 사용하는 기숙사가 있어 그곳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역시 아저씨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차라리 여관을 가지...'

욕실 또한 사정이 마찬가지인 터라 간단한 세면만 마치고 다시 문 밖으로 나와 철제 계단에 쭈그려 앉았다.


[사월이 자니?]

메시지를 보내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순간 회신이 왔다.

[아니, 안 자~]

[안 자고 뭐했어, 벌써 열한 신데!]

[그냥.. 쓸쓸해서..]

[어이구 우리 사월이가 나 없어서 쓸쓸했구나!?]

[응...]


내가 없어서라고는 하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더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녀에게 힘이 되는 말 한 마디를 해주고 싶었다. 어떤 말이 좋을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며칠 전 그녀가 선물해준 책에서 읽었던 글귀가 생각났다.


['당신이 아니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세계였으면 해요. 당신이 아니면 꽃도 새도 별도 사라지는 것이 우주였으면 해요.' 이거 사월이가 준 책에서 본 글이야. 지금 나한텐 네가 이런 사람이야. 잠깐 떨어져 있다고 멀어진 거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려줄래? 금방 올라 갈게^^]


[나의 우주에는 김찰스라는 별 밖에 없지요! 빨리와!ㅋㅋ]


순간적으로 생각이 나기는 했지만, 책 속의 말은 분명 지금의 내 마음을 정확히 나타내 주고 있었다. 아직 시 월의 초입이었으나 벌써 시 월의 초입이기도 했으니. 고작 한 달 보름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문득문득 그녀의 디데이가 생각이 날 때면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그녀가 없다면,

다시 아무것도 없는 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 꿈같은 시간에서 깨고 나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라면 한 그릇과

소주 한 잔을 앞에 놓아둔 내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밤바람과 서울의 두 배 정도로 내리쬐는 하늘 별빛에 세수를 마쳤다. 그리고 다시 깨끗해진 마음에 그녀를 담아본다. 아직은 행복하자고, 쓸쓸한 생각은 조금 더 뒤에 하자고.


그녀가 말했던 쓸쓸함은

대략 나와 비슷한 쓸쓸함이었을까.


내일 그녀를 만나면 꼭 갈비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안아주리라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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