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가을 바람이 열린 창을 넘어 들어온, 마음과 머리가 동시에 선명한, 그런 아침. 몸을 조금 더 웅크려 어제보다 차진 바람과 사투를 벌이던, 그런 아침. 늦은 밤 서울에 도착해, 돌아온 기념으로 한잔 하러 가자던 과장님 덕에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 없는, 그런 아침.


'....!! 아차, 오늘 데이트!'


며칠 간의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면 곧장 그녀를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래 놓고 지각이라니. 있을 수 없어!'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꽤 격렬한 세면을 마쳤다. 머리를 말림과 동시에 옷을 골랐고, 로션을 툭툭-, 혹은 쓱쓱-, 대충 펴 발랐다. 그리고 데이트 준비물인 '일인용 텐트'를 집어 들고 나오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미안, 나 지금 나왔는데, 십 분정도 늦을 것 같아. 괜..찮지..?"


그녀는 꽤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여유가 생기셨나 봐요 김찰스 씨. 지각을 다 하시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그녀가 심드렁하거나, 심기가 불편하거나, 성질을 내거나 할 땐, (이러면 안되지만) 참 귀엽다. 뭐랄까. 양 쪽으로 팔짱을 턱 끼고 앉아 콧김을 내뿜는 이미지인데, 그게 참 아이 같다고 할까. 그래서 그녀의 성질은 대체로 기분이 좋다.


오늘 데이트의 테마는 평화로움이었다. 가을의 한낮은 역시 평화로움의 상징이었으니.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녀와 단 둘이 있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포 한강시민공원을 찾기로 했다. 텐트와 돗자리, 도시락, 기타를 들고 말이다. 예정대로 십 분정도 지각을 했고, 예상대로 그녀는 그런 이미지였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그녀를 꼭 안았는데, 그녀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해 지금? 뽀뽀가 먼저잖아."


'캬- 그녀는 아무래도 사랑의 결정(結晶) 임에 틀림없을 거야.'


대략 이 정도의 달콤한 커플들이 공원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연인이나 가족들이 한데 모여 각자의 행복을 뽐내는 그런 장소인 것처럼. 쉽게 져줄 생각이 없던 우리도 그들의 틈바구니로 들어가, 허공에 던지면 자동으로 펴지는 일인용 텐트와 노란 바탕의 귀여운 돗자리를 깔았다.


그리곤 당연한 수순을 밟듯 그녀가 준비해온 도시락을 펼쳤다.


"이햐. 이거 네가 직접 다한 거야?"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가 대답했다.
"그럼! 이 정도야 뭐!"


흔한 김밥과 흔한 유부초밥도 그 자리에선, 그 시간에선, 절대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 말고, 그 누가 나를 위해 도시락을 싸줬단 말인가. 감격에 차있는 상태로 김밥 하나를 집어들던 순간 그녀가 다시 말했다.


"뭐하는 거야? 이거 공짜 아닌데? 선불이야."

무슨 말인고 하니,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볼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이렇게 행복한 건 반칙 아니냐고!'

분에 넘치는 행복에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던 식사를 마친 뒤, 이어서 그녀가 기타를 잡았다.


언젠가 그녀가 녹음해준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눈 앞에서 직접 기타를 들고 있는 그녀를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몇 번 기타 줄을 퉁퉁 튀기던 그녀가 얼마 전 부산에서 함께 본 영화의 주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기타 줄이 튕겨져 만들어지는 음표들이 곧장 내 귀로 흘러들었고, 음표와 함께 들어온 그녀의 목소리는 내 심장을 좀 더 빠른 속도로 뛰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포근한 햇볕이 물결 위에 부서지고, 찰랑거리는 바람이 잔디를 빗어주며, 그녀는 나를 향해 노래를 부른다.


이렇듯 내 안의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초월한, 믿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이것은 한순간 열렬히 타오르다 이내 식어버리는 성냥처럼, 마침표가 찍혀 있기에 더 환해 보이는 사랑일까.'


불현듯 슬픔이나 쓸쓸함 같은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여전히 난 완벽한 사랑의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점점 소리가 잦아들고, 그녀가 숨을 내뱉었다.


"후... 어때, 괜찮았어?"

그리고 난 그저 동경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분명히 주변의 누군가들은 우리를 아니, 그녀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을 테고 연주를 마친 뒤에도 역시 그녀를 보고 있었겠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니, 우리는 이 공간이 온전히 우리 둘만 가득한 곳인냥 입을 맞췄다.


물론 공공장소에서의 스킨십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하지만, 그것 말고는 쿵쿵대는 내 소감을 알려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나 기다려준 것도, 도시락도, 노래도. 그냥 전부. 전부 다."


그 말을 들은 그녀가 배시시 하고 웃자 난 다시 그녀를 안았고, 그녀의 어깨너머로는 잔디의 초록빛과 멀리 반짝이는 물빛만이 가득했다.





매거진의 이전글열일곱번째이야기_남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