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하... 이 바보 같은 놈!!!'

머리 위로 무언가 '번쩍'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 우리 50일 챙기고 싶었는데...'

그녀와의 만남은 '끝날'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이렇게라도 기념일을 챙겨주고 싶었다.


남들 다하는 100일, 200일, 1주년. 이런 흔한 것들을 우린 할 수 없으니까.

꽤 쓸쓸한 생각이었지만 기념할만한 날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며칠 전 그녀와의 말다툼 덕분에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안돼. 이렇게 포기할 순 없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퇴근 후에 그녀와 함께 갈 식당을 찾기 시작했고, 다행히 평일이라 수월하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그녀에게는 말하지 않은 채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오늘 저녁 시간 되십니까요, 사월양?]
[음... 바쁠 거 같은데요~?]
[안돼. 바쁘지 마. 나 만나야 돼.]
[오 상남잔데??]


'좋아. 자연스러웠어!'

약속도 잡았겠다, 이젠 선물을 고를 차례.


'선물은... 장갑이 좋겠어.'


많은 선물 중에 장갑을 고른 것은 나름 의미가 있었다. 뭐, 벌써 바람이 차가워진 탓도 있지만, 그녀가 이 땅을 떠날 때쯤엔 지금보다 찬바람이 불테니까. 그녀가 지낼 바다 건너에도 겨울이 와 있을 텐데, 그곳엔 그녀의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흥, 모르지 또!)


일단은 그렇게라도 마음을 남기고 싶었다. 그 시리고 외로운 곳에서도 내가 남긴 마음을 기억해주길 바랐다.


이런(웅장하고 진중하고 무겁고 진실되며 거대한) 뜻을 담은 것 치고는 차분하고 조용한 소재의 장갑을 골랐다. 그리고 퇴근 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백화점에 들러 봐 두었던 선물을 샀다.


"아, 저.. 포장, 예쁘게! 예~쁘게! 해주세요. 중요한 선물이라서요."

"네, 예쁘게 해드릴게요."
내 말을 들은 점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차, 늦었다!'
중간에 선물을 사느라 그녀와의 약속시간에 늦어버렸다.

왠지 심통이 나있을 것 같은 그녀.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고, 먼저 와있던 그녀의 얼굴엔 심통이 가득했다.


"데이트 신청한 게 누구였더라?"
"미안, 미안, 어디 좀 들렀다 오느라!

대신 식당 예약해놨어. 거기로 가자."
"어? 예약 내가 했는데?"
"응? 무슨 말이야, 내가 준비 다해놨는데? 거기 가야 돼!"

"아니,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 돼! 거기로 갈 거야!"


'아... 안되는데... 오늘 그냥 저녁이 아닌데...'


나름 기념일이라고 멋진 곳으로 예약을 해놨던 것이 아깝게 됐지만 간만에 그녀가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 '뭐 장소가 대수냐' 하며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메뉴는 그녀가 좋아하는 생선초밥. 조용한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말했다.


"사실 좀 늦긴 했지만, 선물."
가방 안에 숨겨둔 장갑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자, 그녀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놀라더니 내게 묻는다.


"응?? 무슨 선물이야??"
"우리 엊그제 싸운 날, 우리 만난 지 50일째 되는 날이었거든. 싸우느라 챙기지 못해서... 늦었지만 기념하자고!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뜯어보지도 않고 별로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망설이던 그녀가 주섬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상에 올렸다.


그녀가 꺼낸 것은 곧게 선 나무들 사이로 손을 맞잡은 연인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나도 준비했거든."

알고 보니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오늘을 기념하고자 했던 마음은 같았던 것이다.


그림에 조예가 깊지 않지만, 그림이 주는 느낌은 봄처럼 파랬고, 따뜻했고, 다정했다. 바로 얼마 전 다녀온 남이섬에서의 우리를 그렸다는 그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그림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분에 넘칠 정도로 고맙고 감사한 선물이었다.


"나 그림 잘 못 그리는데, 그냥 그려본 거야."
쑥스러운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고,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이 그림에 우리가 담겨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내가 대답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이제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하고 무거울 수도 있는 날이었지만 그녀와 나는 오히려 더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가 이만큼 사랑했음을 축복하고 있었다.


"고마워 강사월, 잘 간직할게.

그리고 계속 기억할게.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아직 남아있는 절반도 지금 까지처럼 사랑만 하자.
그 이후는 또 우리 인연대로 흘러갈 거야.

그러니까 우리 너무 앞만 보지도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냥 서로만 보면서 사랑하자.

고마워요.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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