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흠...'


내가 어색함이나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던 것처럼, 그녀도 느낀 것일까. 본래 자기 전엔 잠깐이라도 목소리를 듣고 자던 그녀였는데, 내일 보자며 문자를 마쳤다.


'아직 심통이 나 있는 건가'

'아니지, 심통이 아니라 서운했던 거겠지'

'내가 너무 솔직했던 건가'


나만 좋을 대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뭐, 거짓말은 할 수 없으니까.'라고 생각했겠지만, 가뜩이나 마음 여린 그녀에겐 내 말이 상처가 됐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답답한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 내일은 그녀의 집에 가보기로 한다. 어느새 달이 서쪽 중간쯤에 걸려 있었다.


다음날엔 해가 동쪽 중간쯤에 걸릴 때쯤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핸드폰을 봤는데, 역시나 그녀의 흔적이 없다. 밤 사이 다녀가길 바랬는데.


아쉬운 마음 뒤로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뭐, 얘기는 만나서 하는 편이 더 좋으니까.


'만나기만 해봐라. 엄청 예뻐해 줄 테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다.

'어라? 없나?'

그래서 한 번 더 눌렀다.


'흠.. 없는 거야.. 무시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기척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뭐야, 있었어? 걱정했잖아. 뭘 했길래 여태... 응?"

'뭘 했길래 여태 연락을 안했냐'는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바닥이 찰랑거리는 소주 병과 방 안을 가득 메운 술냄새가 내 눈에, 그리고 코에 들어왔다.


아마 그녀가 마신 술의 근원이 나 같아서, "어휴! 술냄새! 문 열어 얼른!" 같은 면박을 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잠옷 차림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귀여울 정도로.


아마 온통 술냄새가 가득 찬 방에 본인이 지금 모양새로 내 앞에 서있는 것이 창피해서 그럴 테지.(사실 당황한 그녀의 모습은 적잖이 사랑스럽고, 인간적이었는데.)


그렇게 그녀는 며칠 만에 본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기저기의 창문을 열러 다녔고, 그 일이 끝나자 씻고 온다며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참내... 안 본다 이거지?'


"이리와."


팔을 휙 잡아채 내 품에 그녀를 담아 넣자, 아직 물이 묻지 않은 그녀의 몸에선 술냄새와 함께 향기가 올라왔다. 향수나 비누 냄새가 아니라 오직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그녀의 향. 오늘처럼 그녀를 안을 때마다 언제나 맡을 수 있던 부드럽고 따뜻한, 기분 좋은 향.


잠시 입을 다물고 향을 즐기는데 그녀가 말했다.


"미워, 김찰스."


나로 인해 얼었던 마음의 벽이 조금쯤 녹았는지, 내내 무심한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던 그녀에게서 눈물이 터졌다.


"이구이구! 울지 마, 왜 울어! 나 미웠어? 나 지금 우리 사월이 앞에 있는데 미웠어?"

"그만 울어, 사월이가 왜 울어. 내가 잘못했는데, 내가 아주 못된 놈이라고 내가!"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실 예쁘기 그지 없는, 아이 같은, 마치 울음의 결정(結晶) 같았다.


그 예쁜 모습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울게 내버려둘 수 없었으므로 난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그녀를 달랬다.


"그래 그래, 이제 그만 울어, 괜찮아, 내가 지금 사월이 안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이제 그치고 씻고 와요."


내 말을 듣고 훌쩍이며 눈물을 닦던 그녀가 말했다.


"나 배고파. 라면 끓여줘."

"응? 사월이 아직 눈가에 눈물 마르지도 않은 거 알아?"

"아 알아!!"


힘껏 심통을 부리고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나. 씻고 나온 그녀는 라면을 먹으면서도 뾰로통한 표정을 유지했다. 내가 묻는 말엔 고갯짓만 하면서.


아무래도 그녀의 심술을 풀어주려면 더 큰 사랑을 보여야 할 것 같아 식사를 막 끝마친 그녀에게 곧장 손짓했다. 이리오라며, 내 무릎을. 툭툭.


그제야 내 허벅지에 올라 앉아 내 허리와 목을 감싸는 그녀였다. 그리고 난 그녀의 체온을 느끼자마자 가슴 깊이 얼굴을 묻었으며 부드러운 향기에 휩싸인 채 말을 시작했다.


"우리 사월이 나 많이 사랑하지?"

"나도 우리 사월이 엄청 사랑하는데, 알아?"

"몰라? 음, 왜 모르지? 엄-청 엄청 사랑하는데?"


사랑스러운 자세를 계속해서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지금이잖아. 한 달 뒤에 찾아올 시간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감정을 소모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래. 일본 가면 안 좋아할 거라는 게 아니라구. 무슨 말인지 알지? 우리 사월이 똑똑하니까! 우리 남은 시간 동안은 좋은 생각만 하기야!! 알았지! 할 수 있지!?"


그리고는 예약된 제주도행 티켓을 보여줬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응? 우리 제주도 가?"

"응. 가자. 제주도."


가서 많이 걷자.

사월이가 좋아하는 거 실컷 먹자.

쉴 새 없이 사랑하자.


그래서 우리,

절대 잊혀지지 않는 기억 만들자.


알았지.




매거진의 이전글서른두번째이야기_남자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