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번째이야기_남자편

by 김찰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러니까 아주 꿈같이 행복했던 그런 밤. 그녀가 말했던 잊지 못할, 그런 밤을 보냈다. 한겨울 잔뜩 달궈진 통에서 군고구마를 꺼낸 것보다 더 뜨겁던, 현실의 것들은 생각할 틈이 없을 정도로 치열했던 밤.


그리고 아침.

조금 전까지의 열정과 치열함들은 새벽녘의 손길 덕에 차분해지고, 푸른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 순결한 바람 덕에 잔잔해져 있었다. 창을 넘어오는 바다소리 덕에 나 역시 굉장히 진정된 상태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녀와 난, 이곳에서 아침 해를 보자고 약속했었는데 그녀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윳빛 커튼 나풀거릴 때-'는 아니었지만, '잠이 든 그대 뺨에-'키스를 시작했다. 물론 키스는 뺨에서 끝나지 않았고, 그녀의 귀와 목덜미, 하얀 어깨와 부드러운 가슴을 지났으며, 결국 그녀가 땅을 딛는 발끝까지 다다랐다.


그제서야 간지럽다며 몸을 비트는 그녀에게 말했다.

"옷 두껍게 입구, 이불도 가지고 나와."


우리는 빨갛고 노란 각각의 머그컵에 커피를 담았고 나란히 앉아 한없는 바다를 쳐다보았다. 적막한 시간을 지나 곧 새빨간 해가 고개를 내밀자 바람은 따뜻해지고 주위는 빛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소원 빌었어?"

"응. 당연하지."

"뭔데? 뭔데? 말해줘!"

"지금 자기랑 다시 따뜻한 이불에 누워서 사랑하는거."


물론 소원은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모든 영광을 햇님께 돌립니다.)


이제 해가 아주 높이 걸려있을 무렵, 다시 숙소를 나선 우리.


체력이 약한 그녀를 배려해 오르막이나 산지는 코스에서 빼버렸다. 차로 갈 수 있는 곳만 정하다보니 여행 코스가 지루해질 수도 있었는데, 그녀는 가는 곳마다 최고로 신난 어린아이 같았다. 오후엔 차(茶) 박물관에 도착했고 그녀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제주도 너무 좋다. 그치? 제주도에서 같이 살까?"

"어휴, 일본 안갈거야? 전에는 외국에서 살자더니. 어디였더라. 슬로바키아?"

"아니 뭐 여기서도 살았다가, 저기서도 살았다가. 그러는거지 뭐! 찰스랑 같이 하면 뭘 못해. 내가!"


그녀는 항상 말을 예쁘게 했다. 습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찰스랑 하면.' 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나와 함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이 매번 고마웠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실' 이라고 불리는 각종 골칫거리(주로 '돈'과 관련된) 따위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말하던 그녀.


언제나 그녀는 나라는 '사람'이 우선이다. 이런 여자를, 고작 석 달만에 이렇게 사랑하게 된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찾아든 슬픔 덕분에 눈이 약간 젖으려던 때, 그녀가 큰 소리로 얘기했다.


"가자 찰스! 다른데 또 가야지!"


역시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할 때마다 목소리가 커지는 그녀였으니까, 난 알 수 있다. 다 마신 찻잔과 쟁반을 들고 나가며 엄지손가락으로 왼쪽 눈에 걸려있던 눈물 방울을 닦았다.

'이러지마. 아직 아니다... 아니야...'


자리에서 날 기다리던 그녀가 그새 또 웃으며 말했다.

"우리 저녁 일찍먹자."

"왜? 나 배 별로 안고픈데?"

"안돼, 안돼! 족욕카페 가야 돼! 가서 맥주 마셔야 된단 말야! 지금 가야 된단 말야!"


역시 어떤 상황에서든 미소를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그래, 그래, 가자, 가!"


둘째 날이 저물던 시간이었다. 그 때의 우린 저녁을 배불리 먹은 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눈으로는 그녀를 또렷이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오늘도 정말 완벽한 하루였어요. 고마워."

"뭐가 자꾸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요."


맥주병을 쥔채로 내 목을 끌어안아주는 그녀, 그리고 난 그녀를 내쪽으로 더 당겨 안았다.


여전히 뜨겁게,

세게.


그리고 날이 밝으면, 우린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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