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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가 깨어나는 밤

by 박지현

내 나이 서른.

친구들의 결혼식 청첩장이 두 달 새 네 통이나 쌓였다. 축의금만으로 통장 잔고는 훅훅 줄어갔다. 소셜 미디어에는 친구들의 신혼여행 사진이 올라온다.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의 행복이 축하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시점이 있다는 걸. 마음껏 축하해 주기보다 부담을 먼저 느끼는 내 모습이 싫어진다는 걸 말이다.


어릴 적 막연히 꿈꿨던 인생은 그 무엇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26살, N번방을 추적하며 디지털 성범죄 근절 활동가 3년 가까이 일하다가 정치권에 들어오게 됐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뛰어들었던 정치의 세계는 생각보다 좁았다. 얼굴이 알려지는 대신, 선택할 수 있는 일의 폭은 좁아졌다. 나는 여전히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당장 나는 생계를 이어가기 바빴다.


간간이 아는 사람을 통해 단기 알바를 하기도 했다. 종종 들어오는 강연이나 발표 의뢰도 있었지만 생활비로 충당하기에는 늘 간당간당했다. 그런데 돈 나갈 일은 천지다. 왜 하필 이럴 때 생활용품은 한 번에 똑떨어지는지… 매달 나가는 통신비에 국민건강보험료, 전기세와 수도세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와중에 화장실 변기까지 고장이 났다. 물소리가 멈추질 않아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유튜브를 보며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 실패하고 기사님을 불렀다. 부품을 세 개나 갈아야 한다며, 출장비를 포함해 5만 원이 들었다. 기사님은 집을 나서면서 “아휴~ 이틀 동안 물 샜으면 수도세 엄청 나올 텐데요~”말을 남겼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수도세 고지서가 두려울 따름이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함께 마음의 여유도 줄어들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알바를 알아보는 일이었다. 알바 앱에서 화면을 내릴 때마다 시급과 시간대가 휙휙 지나갔다. 편의점, 카페, 식당… 대부분 ‘오후 6시 이후 근무’, 혹은 서빙 위주의 일이었다. 나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저녁엔 대학원을 가야 했으니 오전부터 낮 시간 위주로 할 수 있는 일, 또 하나는 어지간하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업장에 민폐를 끼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알아봐 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반갑게 인사했지만, 온라인에선 악성 댓글이 낯설지 않았다. 현실에서 그런 사람을 마주한 적은 없어도 혹시 나를 싫어하는 이가 찾아와 업장에 피해를 주면 어쩌나 싶은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손님을 마주하지 않는 일은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은 단기 알바였다. 강아지 산책, 아기 돌봄, 설거지, 물류센터 알바를 포함해 되는대로 이력서를 여기저기 남겨 두었다. 강아지 산책이나 아기 돌봄 같은 일은 경쟁자가 치열해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밤 9시쯤, 침대 위에서 멍하니 누워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오늘만 보너스! 추가수당 9만 원! 하루에 20만 원 벌어가자!”


물류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따로 알바 면접을 볼 필요도 없었다. 워낙 일이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아 걱정은 살짝 됐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바로 신청 링크로 들어가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제출했다. 5분쯤 흘렀을까, 바로 전화가 왔다.


“오늘 일 신청하셨던데 하실 수 있죠?”

“네네!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집 근처에 오는 셔틀버스를 확인하는 것. 업무에 투입되기 전에 온라인으로 일용직 근로자 교육을 한 시간 정도 듣는 일이었다. 약간은 설레면서도 두렵기도 했다. 밤새 일을 해야 하니,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갈까 싶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잠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시계가 12시 40분을 가리킬 때, 나는 첫 근무가 예정된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 안은 조용했고, 하나둘 사람들이 차에 올랐다. 사람들은 셔틀버스에 오르는 게 나보다 익숙해 보였다. 타자마자 다들 고개를 숙인 채 잠들기 바빴다. 셔틀버스 창밖으로 고속도로의 가로등이 줄지어 지나가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결의에 찬 활동가의 얼굴도, 눈에 힘을 잔뜩 준 정치인의 얼굴도 아닌 그냥 평범한 노동자의 얼굴이었다. 이상하게 그 얼굴을 보는데 마음이 편안했다.


물류센터 첫 출근날, 그렇게 나는 세상을 바꾸는 대신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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