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고 나서야 알았다. 낯선 곳에서 부단히 나를 증명하며 살아야 했던 시간 동안,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든 돌아가면 나를 조건 없이 품어줄 곳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다는 걸. 그곳은 내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곳이며, 비로소 내가 나의 호흡으로 숨 쉴 수 있는 생의 기점이다.
서울에서의 6년을 마무리하고 나의 고향, 원주로 돌아왔다. 돌아보니 서울에서의 삶은 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문득 찾아오는 고립감, 그리고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도시의 소음들. 그곳에서 나는 늘 긴장 상태였고, 어쩌면 진짜 내 모습보다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속도에 맞춰 허덕이며 살았던 것 같다.
서울 생활 중에도 반가웠던 순간은 뜻밖에 동향 사람을 만날 때였다. 어느 동네에 살았는지, 초중고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묻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공유하는 맛집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낯선 타지에서 원주 사람을 만난다는 건, 처음 보는 사람일지언정 원주라는 익숙함 속에 편안함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삿짐을 풀고 나서야 비로소 어깨에 들어간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부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오는 소독차를 보며 ‘방구차다!’ 소리치며 제일 먼저 달려 나갔던 내가 자란 바로 그곳,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떡볶이를 나눠 먹던 시내 거리들. 내 모든 학창 시절의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시작된 소중한 뿌리다.
이러한 추억을 함께 공유한 가족들과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의 밀도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이틀 전에도 단계동에서 친구들과 청첩장 모임을 가졌다. 초등학생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곧 결혼을 한다며 친구들을 불러 모은 자리는 동창회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중학교 때 서로의 흑역사들을 떠올리며 깔깔대기 바빴다.
대학 시절 제주도 국토대장정에 참여했을 때, 60명의 청년 중 강원도 사람은 나뿐이었다. 한 친구가 “감자국에서 탐라국까지 멀리도 왔네”라며 농담을 던질 때, 나는 원주에도 영화관과 백화점이 다 있다며 농담 섞인 방어를 하곤 했다. 그때의 나는 강원도도 충분히 '도시'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부심을 느낀다. 높은 건물 대신 창문을 열면 밀려드는 이 서늘하고 상쾌한 공기. 이것은 결코 서울에서는 맡을 수 없는, 오직 이곳에서만 허락된 사치다.
원주에서도 나는 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와 살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원주 시내에는 없는 게 없지만, 내가 사는 이곳은 배달 어플을 켜도 텅 빈 화면뿐이고, 마트에 가려면 차를 타고 10분은 나가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편리하고 빨랐던 서울의 삶보다 지금이 훨씬 풍요롭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던 서울의 집을 벗어나, 거실 깊숙이 들어오는 햇살을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일 감사한다. 가끔씩 마라향 가득한 3단계 마라탕이 먹고 싶은 날이 있지만, 그럴 땐 시내로 나가면 되니까. 편의점의 불빛 대신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빛이, 자동차 경적 대신 풀벌레 소리가 내 하루의 끝을 배웅해 준다.
원주의 모든 길과 풍경은 내 추억과 닿아 있다. 언제부터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었는지 모를 불안이라는 감정이, 매일 아침 마당의 흙을 밟을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치열했던 6년의 경험은 썩지 않는 밑거름으로 삼고, 원주의 단단한 기운을 받아 나만의 꽃을 피우고 싶다. 화려한 서울의 네온사인보다, 해 질 녘 집 앞에서 마주하는 앞산의 능선이 주는 위로가 훨씬 더 소중하다. 그 변함없는 능선을 닮아, 나 또한 이곳에서 흔들림 없이 깊어져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