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산책
지난 6.16일, 주한일본대사관에서 주최한 “한일수교 60주년 기념 리셉션”에 다녀왔다.
일본 사람들은(주로 기자들은)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후, 한일 관계가 후퇴하는 것이 아닌지 상당히 걱정하던 시점이었다. 우리나라 6.3 대선 결과에 대해 다른 외신들이 주로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에 관심을 보이고 있을 때 유독 일본 언론만은 한·일 관계 경색을 걱정했다. 아마 ‘지난 민주당 정부의 대일 강경노선이 재현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반영됐던 것 같다. 리셉션에서 만난 산케이신문의 구로다(黑田) 기자나, 대선 직후 한국을 다녀간 前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 마키노(牧野) 기자나 같은 생각이었다.
실용정부는 그때와 다를 거라며 “다이죠오부! 걱정하지 말아요!”를 연발했던 나로서는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재명 대통령의 축하 영상메시지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G7 정상회의 참석 일정 때문에 물리적으로 우리 대통령의 리셉션 참석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대통령 메시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차였다.
그로부터 3일 후인 6.19일, 주일한국대사관이 도쿄 뉴오타니호텔에서 개최한 기념 리셉션에는 일본 측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를 비롯해 3명의 前 총리를 포함 내각 서열 2, 3, 4위 정치인과 6명의 현직 장관, 국회의원 1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상호주의를 중시하는 일본 측 관례상 이례적이다. 고맙고 반가운 소식이다. ‘가깝고도 멀었던 한일 관계’를 일거에 밀착시켰던 김대중-오부치 브로맨스에 이어 같은 이 씨끼리(?) 이재명-이시바 브로맨스가 실현될 수도 있겠다 하는 기분 좋은 예감을 해본다.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한 한일 양국의 경쟁이 과열되자 FIFA 측은 공동 개최를 제안했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이를 공론화하면서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선물은 1996년 운명처럼 한일 양 국민에게 찾아왔다. 한일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 공동프로젝트였다.
나는 1997.8월부터 2002.8월까지, 역사적으로 한·일 관계가 가장 좋았다고 평가되는 시기 5년 동안 주일본 한국대사관에서 문화관, 홍보관으로 근무한 바 있다. IMF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콧대가 상당히 꺾여있던 시기였는데 1998.8월, 김대중 대통령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 한·일 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것을 일본에서 실감했다. 당시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 한일어업협정 등 양국 협력을 가로막던 난제들도 상당했지만,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와 한일 우호친선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한일 양국은 서로 양해와 수위 조절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과 일본은 함께 월드컵 16강에 진출했고, 운명의 8강전이 같은 날 벌어졌다. 그날은 한국에도 일본에도 비가 왔다. 한국의 붉은 악마들은 선수들을 두고 우리만 비를 피할 수 없다며 하나둘 우산과 비옷을 거두기 시작했다. 경기장은 물론 거리 응원 나온 수십만 명이 비에 젖은채 “대~한민국”을 외쳤다. 같은 시각, 일본 응원단도 응원은 열심히 했지만, 우산을 접거나 비옷을 벗지는 않았다. "일본팀이 져서 아쉽지만 한국팀은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를 했다."며 자랑할 때마다 일본 친구들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도 새롭다.
너무 쉽게 식어버렸던 그때의 한일 우호 협력 분위기. 이제 판을 좀 키워서 재현해 보는 방법은 없을까?
본선 진출팀이 48개국으로 늘어난 2026년 FIFA 월드컵은 북중미 3개국(미국, 캐나다, 멕시코)이 공동 개최한다. 2030년 월드컵은 유럽 3개국(모로코, 스페인, 포르투갈)이 공동 개최하되 남미(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에서도 FIFA 100주년 기념 경기가 열린다. 2026년부터 본선 진출팀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어나고, 경기 수도 64경기에서 80경기로 늘어난 덕분에 바야흐로 공동, 분산 개최는 대세가 된 듯하다.
기회는 2034년 FIFA 사우디아라비아 월드컵이다.
아시아/오세아니아 몫 월드컵에 사우디가 유일하게 유치신청을 했기에 다른 나라가 공동 개최국으로 참가하는 것은 어렵게 됐지만, 80경기의 절반인 40경기 정도를 한·중·일이 가져와 분산 개최를 추진하면 어떨까? 아시아 몫 월드컵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아시아 역내 평화와 우호친선을 지향한다는 명분은 절묘해 보인다. 축구 실력은 다소(?) 뒤지지만, 축구 인기는 높은 중국이 개최국으로 가세한다면 FIFA의 수익 구조에 도움이 될뿐더러 국제적으로 월드컵의 관심을 고조시키는데도 이바지할 것임이 틀림없다. 북한 지역 개최 여부는 나중의 일이다.
그러나,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과 일본인들의 중국 견제 심리 때문에 일본 측이 먼저 제안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중국으로서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딱 한 번 본선에 진출했던 축구 약체국으로서 축구 강국 한국과 일본에 “함께 노력해 보자”라며 먼저 손을 내밀기가 어려워 보인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대중 무역 견제를 한층 강화하고 있고 한미일 3국이 협력관계를 새롭게 해가고 있는 시점이다. 한국이나 일본이 월드컵 분산 개최를 제안해 준다면 중국으로서는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일 것이다.
미국의 우려만 불식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나라가 2034 FIFA 사우디 월드컵의 한·중·일 분산 개최를 주도해 간다면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발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FIFA가 넌지시 제안해 보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올해 하반기에는 경주 APEC도 있어서 한중 및 한일 정상회담은 물론 한·중·일 정상회의도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서울에 있는 한·중·일 협력사무국(Trilateral Cooperation Secretariat, TCS)에서 필요성과 가능성을 심도 있게 검토해 봤으면 좋겠다.
2021년부터 중국 청두 룽청 축구팀 감독을 맡고 있는 서정원 감독이 최근 중국 대표팀 감독 물망에 올랐다는 소식도 있다. 한국산 히딩크가 중국 국가대표팀을 맡아 월드컵 본선은 물론 16강까지 진출시킨다면 중국에 어떤 난리가 날지 상상해 본다.
- 꿈은 자면서 꾸는 것이 아니고, 설레어 잠 못 이루게 하는 어떤 것이다! / Abdul Kalam, 前인도대통령 -
(2025.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