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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미래 Mar 12. 2023

그 이름, 유 선생님 사모님

에필로그

부모님 산소에서 바라본 대관령(2023년 2월 27일)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유 선생님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였기 때문이었다. 유 선생님 사모님은 일제 강점기도, 육이오도 겪으셨다. 힘든 시기를 다 보내셔서 늘 이야기할 게 많으셨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셨지만 똑똑하셨다. 엄마와 이야기하다 보면 많이 배운 분으로 착각하신다. 그만큼 말씀을 잘하셨다. 더군다나  긍정적이셨고 다른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씀만 하셨다. 늘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사셨다. 이제 그렇게 좋으셨던 친정어머니를 볼 수가 없다.



유 선생님 사모님 친정아버지, 즉 외할아버지는  일본으로 일하러 가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벌은 돈을 고향에 부쳤었는데 집에 와보니 형제들과 친척들이 자기들 배만 채우고 다 탕진하고 남은 돈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배운 한학으로 밥벌이하시다가 강릉 선교장에 자리를 잡고 시게 되었다. 정말 풍채도 좋으셨고 잘 생기셨다. 날 외가가 지금 선교장 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유 선생님 사모님은 위로 오빠 두 분, 아래로 여동생 둘을 둔 맏딸이었다. 경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던 중 1958년에 중매로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그냥 아버지 얼굴 한번 보고 결혼하였다고 한다. 결혼 후 강릉시(명주군) 성산면 오봉리가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큰딸을 낳고 두 살 터울로 장남을 낳았다. 아버지가 묵호로 전근을 가게 되어 이사하게 되었고 묵호에서 막내를 낳았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셨다. 그해 아버지가 옥계국민학교로 전근을 가셨는데 거기서 시어머니 상을 치르셨다.


시어머니 상을 치른 그해 가을 아버지께서 멀리 홍천군 내면 당무국민학교로 전근 가게 되었다. 같은 강원도이긴 하지만 대관령을 넘어서 먼 곳으로 발령이 나서 걱정이 많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먼저 학교에 부임하고 세 자녀와 시아버지를 모시고 뒤늦게 학교 관사로 이사하게 되었다. 연로하신 시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야 했다. 그곳에서 시아버지상을 치르고 양지바른 곳에 시아버지를 모셨다. 지금도 할아버지 산소가 홍천군에 있다. 시부모님 두 분이 중풍에 걸려서 유 선생님 사모님이 대소변을 받아내며 수발을 들었다고 하셨다.


1969년에 강원도 홍천군 남면 매산국민학교로 아버지가 전근 가시게 되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우리 집을 장만하셨다고 한다. 마당에 텃밭이 조금 있었고 꽤 넓었던 것 같다. 마당에 커다란 호두나무도 있었다. 아버지가 홍천군 내면 원당국민학교 외 몇 학교에 더 근무하시고 1978년에 홍천군을 떠나 드디어 강릉 교동국민학교로 전보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 객지를 돌아다니셨다. 강릉으로 발령 나시고 1980년에 지금 친정집을 장만하셨다.


고향을 떠나 사시다가 강릉에 내려오신 친정아버지가 병을 얻어 1983년에 돌아가셔서 유 선생님 사모님은 혼자 몸이 되셨다. 시골학교에 계시며 약주를 많이 드신 게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때가 친정아버지 52세, 친정엄마 48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들 두 명이 대학생이어서 몇 년 동안 하숙으로 아들 학비를  벌었다. 큰 딸이 교사여서 동생 학비를 조금 보태주어서 엄마 힘을 조금 덜어드리긴 했다.


큰 딸이 외손자를 낳게 되어 강릉집을 세주고 맏딸집으로 상경하여 두 외손자를 키워주셨다. 그러던 중 가까이 사는 큰 아들네로 가셔서 손녀를 조금 키워주기도 하셨다. 손주들이 크면서 강릉으로 내려가서 홀로 지내셨다. 강릉에 친척도 있고 친구들이 많아서 혼자 사셨지만 늘 즐겁게 사셨다. 삼 남매가 매달 통장으로 용돈을 보내드려서 큰 불편 없이 사셨다.


2021년 5월에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큰딸집으로 오셔서 함께 사셨다. 1년 8개월 동안 큰 병 없이 즐겁게 사셨다. 정말 예기치 않은 병으로 2월 19일에 입원하셔서  검사를 받으시다가 의식을 잃고 2023년 2월 23일 19시 17분에 운명하셨다. 향연 87세셨다.


유 선생님 사모님은 삼 남매를 잘 키우셨다. 외손자 두 명, 친손자 한 명, 친손녀 네 명을 보셨으며 증손주도 4명을 보시고 다복하게 사시다 하늘나라로 가셨다. 증손자 둥이는 왕할머니가 달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유 선생님 사모님은 먼저 가신 유 선생님 옆에 잘 모셨다. 그날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렀다.  파란 하늘 너머로 멀리 눈 덮인 대관령이 아득히 멀다.



유 선생님 사모님께서 떠나셨지만 영정 사진의 미소만큼이나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셨던 유 선생님 사모님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만을 위해 행복하게 지내셨으좋겠습니다.    


유 선생님 사모님, 우리 엄마!

우리는 엄마가 계신동 참 행복했습니다. 남은 저희들도 엄마 사랑 기억하며 잘 살겠습니다.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브런치북을 유 선생님 사모님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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