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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순간은 나를 위해 찾아온다>를 읽고

(서평)브런치 리인 작가님의 글, 정근아 그림, 건율원 출판

by 유미래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정이 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가정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즉 가족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유년 시절 아버지의 불면증으로 아버지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기침마저도 세상에서 가장 작게 하려고 숨죽였던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가 아버지의 나이가 됐을 때 이제 당당하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글로 쓰게 되었다. <삶의 모든 순간은 나를 위해 찾아온다>(2025년 11월 출간)를 출간한 리인 작가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처럼 읽는 동안 숨죽이게 하였다.


14년 동안 일곱 번의 이사, 우주여행은 끝났지만


저자는 여섯 살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14년 동안 일곱 번의 이사를 했다. 평균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집을 옮긴 셈인데 이렇게 자주 이사한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의 수면을 방해하는 소음이 없는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저자는 살았던 집을 일곱 행성으로 표현한다. 일곱 행성 중 오래 살고 싶었던 곳도 있었지만, 잦은 이사는 가족을 힘들게 했다.


이사할 때마다 '저 집안에서 아버지가 잠을 잘 주무실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저자는 기도했다.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마침내 아버지가 천국 같은 작은 행성에서 지금까지 30년 넘게 살고 계신다. 저자의 우주여행이 끝난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불면증으로 힘들었다. 9시가 되면 온 집안의 불을 꺼야 했고, 고등학생일 때 야간 자율 학습이 10시에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도둑고양이처럼 뒤꿈치를 들고 잘 준비하고 방에 들어가야 했다. 나도 야간 자율 학습 세대라 온종일 힘들게 공부하고 돌아오면 부모님께 "우리 딸, 오늘도 힘들었지. 얼른 씻고 간식 먹으렴." 하는 말로 떠들썩하게 위로받고 싶었기에 저자가 모두 잠든 집에 숨죽이며 들어가야 했던 학창 시절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지금이라도 안아주며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싶었다.



신은 선물을 줄 때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준다고 한다. 저자가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불면증이라는 고난의 포장지를 벗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버지의 불면증으로 힘들었던 시절의 아버지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만큼 소중하다.


80년대를 가장으로 살아간 아버지들에게 술은 가장 믿을만한 친구였다. 저자는 술에 취해 조금 느슨해지고 기분 좋아 보이는 친구 아버지를 볼 때면 그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거나하게 취해 집에 오신 아버지가 참 좋았다. 늘 손에 먹을 것을 들고 오시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나와 남동생들에게 용돈도 주셨기 때문이다.


저자의 아버지에게 술은 숙면의 방해물일 뿐이었다. 친구들이 "아빠가 술 마시고 통닭 사 왔어. 용돈도 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부러웠다. 아버지의 술은 아버지를 병들게 했고, 어머니 마음을 까맣게 타들어 가게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제야 20대부터 수면제를 먹으며 가장의 자리를 지켜낸 아버지의 힘들었을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


지금 50이 된 나는 40대의 젊은 아버지를 바라본다. 나보다 젊은 나이에 불면의 밤을 수십 년째 가지고 살던 가장을. 나보다 젊었으나 나보다 지쳐있는 아버지의 등을 쓸어주며 안아 드린다. -53쪽


대학 진학으로 고향을 떠난 저자는 20년 넘게 함께 살면서 스며든 부모님의 말투, 소통 방식, 서로를 대하는 태도 위에 더 따뜻한 온기와 성장의 기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다 시간 내서 집에 가면 "우리 딸이 집에 오니까 엄마가 생기가 도네. 이제 사람 사는 집 같다."라는 아버지 말에 저자는 아주 중요한 사람 같아 좋았다.


나도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녔는데 방학에 집에 내려갈 때면 일찍 퇴근하셔서 딸을 기다리며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우리 아버지는 딸 바보였다. 나를 늘 이름 대신 '우리 공주'라고 불러주셨다. 그렇게 좋은 아버지가 50대 초반에 일찍 돌아가셔서 책을 읽으며 아버지가 자꾸 생각났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표현을 안 할 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건 '잠'이 아니라 '삶'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10대 초반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찾기 위해 외부 세계와 내면이 지은 세계의 간극에서 분투한다. 저자도 열여덟의 어느 밤, 가방에 교복과 책을 챙겨 집을 빠져나갔다. 길에서 친구를 만나 여인숙 같은 곳에 갔다가 함께 있던 남녀 학생들을 보고 잘못임을 알고 돌아온다. 잠깐의 가출이었지만,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여고생이었던 저자의 용기를 응원했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 아니 그러한 길을 찾아내려는 실험이며 그러한 오솔길의 암시이다. -<데미안>(헤르만 헤세)


저자 아버지의 두려움 중 하나는 자식들도 불면증에 걸릴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사위가 될 딸의 남자친구가 처음 인사 온 날 처음 꺼낸 말이 "잠은 잘 자는가?"였다. "네, 잠은 아주 잘 잡니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셨고 다른 것은 묻지도 않았다. 다른 것은 딸의 선택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아버지의 딸을 향한 염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저자는 고향인 경상도를 떠나 경기도에서 혼자 직장을 다니며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어도 아버지의 불면증으로 힘드셨을 엄마의 무거운 짐 위에 자신의 짐까지 올릴 수 없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런 배려의 마음은 엄마와 자식 사이를 더 멀어지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전화로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며, 이젠 소소한 일상도 엄마에게 말하게 되었단다. 암 투병하시는 엄마가 언젠가 훌쩍 저자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도 친정엄마가 폐렴으로 입원하여 기관지 내시경을 받다가 86세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도 '평소에 좀 더 다정한 말을 해드리고 잘해 드릴 걸.' 하는 후회를 지금도 한다. 부모는 자식이 효도할 때를 기다려주시지 않는다. 옆에 계실 때 자주 안부 전화를 드리고 찾아뵙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힘들어하는 걸 보며 자란 아이는 힘든 일이 있어도 부모에게 털어놓지 못한다. 자식이 힘든 짐을 내려놓고 기대어 쉴 수 있는 큰 나무 같은 부모가 되려면 부모 자신이 단단하게 바로 서야 한다. -117쪽


저자는 교사로 일한다. 출근하기 전 매일 새벽 독서로 인문학 공부와 글쓰기를 하며 상처가 치유되어 내면의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게 되었고,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이 책은 인문학 에세이답게 저자가 살아온 삶 위에 사유가 더해졌다. 글 한 꼭지마다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길이 되어 읽는 글마다 사색하게 해 준다. 책을 읽는 동안 불안보다는 마음을 차분하게 바꿔준다. 아버지의 불면증으로 매일 밤을 숨죽이며 살았을 저자의 어린 시절마저도 이상하게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순원 소설가(<은비령>, <아비의 잠> 저자)는 추천사에서 "이 책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용기의 마중물이다."라고 썼다. 그렇다. 책을 읽고 나면 나에게 용기를 주는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질 것이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내가 느낀 점을 '참 아름다운 글이다.'라는 거다.


부모나 가까운 분들에게 용기가 없어 마음을 아직 전하지 못한 분, 지금 어떤 일을 결정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분, 가족 때문에 삶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 상처 때문에 삶이 무겁다고 느끼는 분, 늦가을만큼 아름다운 글을 읽고 싶은 분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소곤소곤 들려주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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