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한국식의 김치 맛을 찾아서
음식을 가리지 않는 것 과 특정 음식을 그리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평소엔 김치 없이 밥만 잘 먹는데도 외국 출장때나 나흘 이상의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꼭 펄펄 김을 내뿜는 김치찜이나 김치찌개, 부대찌개가 그리워지는걸 보면 한국인에게는 김치로 만든 요리를 그리워하는 DNA 라고 있는 것 같다.
다양한 중국 음식을 이것 저것 도장깨기 하듯 도전해보던 중 어느날 갑자기 김치찌개에 대한 그리움이 예고 없이 훅 찾아왔다. 물론 중국 어느 마트에서도 한국 김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kg 단위로 파는, 비닐에 묶인 종가집 김치도 있고 1인 가구를 위한 소형 병제품도 있으며 브랜드도 제법 다양하다. 병으로 된 제품은 주로 피클, 장아찌들과 같이 진열되어 있고 간혹 김치라고는 써 있지만 국적불명의 절임으로 보이는 상품들도 있다. 잘 알려진 종가집 김치 소포장을 몇번 사서 먹어봤지만 일식집에서 나오는 김치처럼 단맛이 강하고 잘 익은 김치 특유의 산미가 없는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부족한 맛이었다.
covid-19 때문에 집에서 재택 근무를 하던 두어달 간, 밖에 나가도 가게들이 죄다 문을 닫아 할일이 없고 운동하러 잘 나가지도 못해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굉장히 많은 집안일을 했었다. 과탄산수소와 뜨거운 물로 수전을 번쩍이게 닦기, 방울토마토 묘목을 키워 토마토를 자급자족 하기, 타일 줄 눈 사이에 곰팡이 제거제를 뿌려 불렸다가 새하얗게 닦기 같은 여러 일들 중 제일이 바로 김치 만들기였다. 시내 마트의 김치 맛에 실망하고 한인촌에 가서 사먹는 김치마저도 100% 만족스럽지 않아 저지른 일이었다.
중국에서 한식 재료 구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김치에 꼭 들어가야 하는 고추가루나 새우젓은 물론이고 액젓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상하이의 한인촌인 홍췐루는 살던 집에서 거리가 있어 잘 가지 않는 곳이었는데 굳이 홍췐루의 한인 식재료 마트에 갈것도 없이 그냥 동네 마트 앱으로도 얼마든지 김치에 들어가는 기본 재료를 살 수 있다. 일단 고추가루, 액젓, 새우젓이란 마법의 기본 재료가 생기고 나니 의욕이 앞서 인터넷으로 다양한 김치 레시피를 검색하며 뭘 하면 좋을지 계산을 해보기 시작했는데 그 중 첫번째가 바로 파김치였다. 참고로 원래 그 전에 김치를 집에서 해본적이 있느냐 하면 엄마가 하는거 본적만 있고, 자취도 해본 적 없지만 어쩐지 별로 어렵지 않고 할만하겠다 싶었다. 쪽파를 다듬고, 액젓에 파 뿌리 부분만 넣어 절이는 동안 부산하게 밀가루 풀을 끓이고, 양파와 사과, 불린 고추가루를 믹서기에 갈아 양념장을 만들었다. 너무 잘 되면 어쩌지? 파김치는 짜장라면이랑 먹는게 제일인데 하며 좀 신난 나는 파가 절여지는 이십분 동안 짜장라면 한 번들을 급히 주문하기까지 했다. 버무리는 동안 집이 엉망이 되지도 않았으며, 뒷정리도 간편했고, 상온에 하루, 냉장고에 이틀정도 보관한 뒤 경건히 짜장라면을 끓여 함께 맛보니 결과는 너무나도 성공적.
일단 파김치를 한번 그럴듯하게 해내고 난 뒤 한층 대범해진 나는 농장 산지 직송 앱을 찾아내 마트에서보다 훨씬 큰 단위인 킬로 단위로 채소를 저렴한 가격에 주문해 사기 시작했다. 무와 오이, 쪽파로 시작한 산지 직송이었지만 그 뒤로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리치나 용과, 복숭아, 패션 프루츠 같은 과일도 산지 직송 앱으로 알뜰살뜰히 주문해 먹기 시작했다.
파김치 성공의 기세를 몰아 해 낸 일은 채소 대량 구매 뿐이 아니었다. 채소를 절일 소금도 대량으로 사들였으며 김치를 저장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냉장고를 비우고 선반 구석구석을 박박 닦아 놓기도 했다. 자취인의 성지 이케아에 가서 김치를 담을 밀폐용기도 좀 더 사들였다. 주문한 무가 중국 어느 농가에서 우리집에 도착한 날 아침, 나는 싱크볼에 물을 잔뜩 받고 수세미와 칫솔로 무 주름 사이사이를 박박 씻어, 필러로 껍질을 벗긴 뒤 주사위 모양으로 큼직하게 썰어 소금을 켜켜이 뿌려 절였다. 음식물 쓰레기 봉투엔 무 껍질이 한가득 찼고 부엌에서는 쌉싸름한 무 향이 진동했다. 무가 절여지는 동안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쓰레기장에 나갔다 오고, 밀가루 풀을 쑤고, 사과와 배, 양파를 갈아 양념장을 만들고, 쪽파를 잔뜩 썰어두고 밑반찬으로 꽈리고추 졸임도 함께 만드는 내 모습은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깍두기 역시 성공적이었다. 이제는 소고기 무국을 끓여 먹을때에도, 사리곰탕 면 같은 흰 국물 라면을 먹을때에도 아쉬울게 없었다.
깍두기고 잘됐다고 신나하던 어느 날, 무와 함께 주문했던 오이가 도착했다. 한국에서 오이소박이를 만들 때 쓰는 오이보다 가시가 적고, 짤막하며 동그스름하고 물기가 많은게 날걸로 먹어도 과일같이 딱 좋을 맛이었다. 양이 많아 반절은 샐러드로 먹기로, 반절은 절여서 김치를 하기로 결정하고 김치 할 오이를 다듬었다.
굵은 소금을 뿌려 껍질을 박박 닦고, 꼭지를 따고 적당한 길이로 반토막 낸 뒤 십자로 금을 낸 뒤 켜켜이 소금을 뿌려 절인 오이가 어느덧 볼에 잔뜩 쌓였다. 버무릴 그릇이 작아 조금씩 나누어 양념과 버무려야 했지만 무채와 파채를 가득 채워넣어 버무린 오이 소박이도 상온에서 하루를 보내고 냉장고에 보관하고 나니 그 맛이 좋았다. 원래부터 배달 음식을 대단히 많이 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때부터 집밥을 더욱 본격적으로, 각잡고 하기 시작했다. 꽈리고추 졸임, 견과류 멸치볶음, 무조림, 어묵볶음, 달걀 장조림, 표고버섯 다시마 조림 같은 밑반찬이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여갔고 사다두었던 잡곡쌀과 병아리콩도 바닥을 보였다. 매일을 건강히 먹고 건강히 운동하다보니 (헬스장에 가지 못해 아침마다 32층짜리 빌딩 1층부터 32층까지 달려 올라가기를두서너번 반복하고 집에서 캐틀벨 운동을 했다) 내 평생 가장 건장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김치 3대장이 갖춰지고 나니 밥 하기 애매해 라면을 끓여 먹는 날에도 그럴듯한 식탁이 차려지는게 제법 우쭐하고 기분 좋았다.
파김치와 깍두기는 너무 간단해 그 뒤로도 두어번 더 해 먹었고 나중엔 무와 고추, 열대 과일을 가지고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화려한 겉모양의 (?) 물김치를 하기도 했는데
희안하게 배추김치만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김장배추 같은 커다란 배추를 마트에서 보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아무리 잘게 쪼개서 배추를 절인들 무나 오이처럼 나누어 절일 그릇도, 버무릴 그릇도 마땅치 않아서였다. 그러나 공간과 여건이 된다면 나는 어김없이 배추김치도 해 냈을 것이다. 집이 조금 컸거나 그릇을 갖추고 나면 타오바오 어느 쇼핑몰에서 김장용 매트나 고무장갑을 구했을지도 모를일이다. 어쨌든, 나의 김치 도전기는 파김치, 깍두기, 오이소박이, 물김치에서 끝이 났고, 가장 흔한 배추김치는 만들지 않았다. 대신, 김치찜이나 익은 김치로 끓인 찌개가 먹고싶을때마다 한국의 것과는 맛이 약간 다른 농심 김치 큰사발면을 사먹거나, 절인 채소를 고명으로 얹은 시큼하고 짭짤한 미시엔(米线)을 먹거나 타이얼(太二) 이란 솬차이위(酸菜鱼) 전문점에 가서 솬차이위를 먹었다. 한국에 돌아오는 그날까지 마음에 차는 익은 김치를 찾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허전함을 달랠 대체 식품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김치찌개와 맛이 비슷한 건 솬차이위(酸菜鱼)였다. 시큼한 맛이 나는 절인 채소(酸菜)를 흰살 생선, 마늘, 고추, 다양한 토핑, 기름과 함께 끓여낸 요리인데 겉은 허여멀건하거나 누렇고 김치찌개와 생판 다르게 생겼어도 그 맛이 익은 김치로 끓인 찌개 같이 시큼하고 시원하다. 밥 한그릇을 시켜 국물과 생선살, 채소를 떠 먹으면 정말 김치찌개와 생선구이를 함께 먹는 기분이었다.
몸이 좀 허하거나, 이제는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한국에 너무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날 마다 나는 친구들을 졸라 타이얼(太二)에 가자고, 솬차이위(酸菜鱼)를 먹자고 조르곤 했고, 친구들은 흔쾌히 김이 펄펄 나는 커다란 그릇을 앞두고, '이거 눈감고 먹으면 김치찌개같은 맛이 나~!' 하는 실없는 내 얘기를 들어주며 옹기종기 함께 식사를 해 주었다. 어디선가 들은적이 있다. 독일에 간 유학생들이 김치찌개가 먹고싶으면 사워크라우트에 (독일식 양배추 절임) 핫소스를 뿌리고 끓여 먹는다고. 그것만 들어도 세계 각지의 한국인 노동자들과 유학생들이 한국 김치 맛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맛을 내보겠다고 주변의 재료들을 찾아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움과 간절함이 더해진 전 세계의 김치 대체식들은 그래서 더욱 그럴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