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체육시간에나 입었을 법한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가슴팍에는 큼지막한 번호를 달고 있다.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는 사람들은 저마다 표정을 가지고 있다. 입꼬리만 슬쩍 올라가 누가 봐도 악당처럼 비열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관계 없다는 무심한 표정을 지은 사람도 보인다. 옆에 있는 얼이 빠진 듯한 할아버지를 챙기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정 많은 사람도 보인다.
그 앞에는 그 다양한 표정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듯 '표정' 대신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그려진 마스크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이 운동복 입은 사람들 앞에 서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적어도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은 모른다. 그들은 그저 그 속에서도 내 감정과 본능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먼저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운동복 하나와 운동화 한 켤레이다. 그러나 온전하 내 공간, 내 집 대신 주어진 것은 트인 공간에 놓인 침대 몇 개이기 때문에, 주변이 어두워져도 눈을 감고 자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비열하게 웃고 있던 그 사람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 그 무리들이 만드는 공기가 운동복을 입고 침대에 누운 사람들이 있던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특별히 어떤 위협을 입 밖으로 낸 것은 소수이지만, 이미 공포를 직감한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경계가 이제는 저 멀리 있다 선명해지는 수평선처럼 다가온다.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지금 보니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로 가는 배였던 것이다.
갑자기 불이 켜진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다양한 표정처럼 다양한 감정이 서려 있다. 불안함과 공포는 이제 일상이 되었지만, 그중에는 이따금씩 호기심과 흥분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은 감시카메라가 켜진 좁은 복도와 계단을 몇 번씩 오르고 내리며 다른 방으로 이동한다. 마치 지금까지 그들의 삶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이유도 모른 채 앞사람을 따라 걷고 있다.
그들 앞에 죽음이 놓인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가 운동복의 사람들에게 시킨 것은 어릴 적 하던 놀이다. 그러나 진다고 하여 기분 나쁘고 잠이 안 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지면 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한다. 그렇다. 정말로 내가 탔던 배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던 배였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 뱃사공의 이름을 카론Charon이라고 불렀는데, 그 습은 역시 늘어뜨린 검은 수의를 입은 해골바가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목적지가 어딘지를 정확히 몰랐던 것은 뱃사공의 얼굴이 친근한 도형들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려움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한 심정이, 지난 삶을 비통하게 곱씹는 후회가, 그러나 살아나갈 수도 있다는 새로운 희망이 내려 앉는다. 향이 다르고 감촉이 다른 그 감정의 안개들은 피부로 느껴보지 않는 한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구경꾼들에게는 놀이겠지만, 목숨이 걸린 전쟁에서 운동복의 사람들은 나누어진다. 이는 가장 먼저의 게임에서 네모, 세모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죽음과 공포라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큰 불이익은 단박에 이 운동복들의 생각을 한 방향으로 좁혔다. 그러나 더욱이 놀라운 것은 그로 인해 사람들을 쉴 새 없이 서로 다른 집단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 사람이 자리를 잡는다. 그 뒤를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유일하게 하얗고 깨끗한 운동화 뿐이다. 채 잠그지 못한 지퍼 때문에 옷이 펄럭인다. 내 편을 찾은 사람의 입꼬리가 전에 볼 수 없었던 정도로 씰룩거린다. 깊게 파인 주름보다도 더 어둡게 내린 낯빛이 보인다.
나는 여기서 나누어지기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나누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마주서는 모습을 보았다. 붕당이나 파벌 같은 케케묵은 것들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몇 년에 한번씩 잊지 않고 선거철이 되면 나누어 지는 우리 모습을 여기서도 보았다.
위협이나 불이익에 모두 모여 목숨을 거는 결기는 찾을 수 없다. 드물게 "불의에 항거한" 모습들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다는 자기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전에도 후에도 어김없이 나누어지고 마주섰기 때문이다.
위협과 공포 속에 우리는 이처럼 흩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내 맞은 편에 선 사람을 새로운 적으로 삼으며 존재의 이유를 찾았던 것이다. 이미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까마득히 잊은 채, 단지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을 규정짓고 판단해 버린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방향을 잃은 결의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나오 모르게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은 이 드라마의 잔혹함과 솔직함에 놀랐던 것이 아니다. 스스로 본 거울 속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었던 것에 놀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