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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소비

한국사람들이 문화를 "쓰는" 방법

by 토끼대왕






거꾸로 먹는 우리

요즘 우리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으로 커피를 들 수 있다. 두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카페다. 처음 커피가 들어왔을 때는 아마 외국의 신기한 음료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커피는 잠을 쫓는 그 기능의 측면으로, 더 나아가 '있어 보이는' 삶의 갖춤 중 하나라는 그 소비의 측면으로 시선이 옮겨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커피에 대한 관심도 그에 비례해서 커진 것은 아니다. 항상 우리랑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한국인이 마시는 커피는 대부분이 아메리카노인데, 이것은 실은 그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는 '더러운 물acqua sporca'이라고 하여 천대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미국의 문화에 더 가까이 살고 있으므로(또는 그것을 더 선호하므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이라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는 마치 치즈김치를 진짜 김치로 오해하는 것과 같다. 내가 그것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의 문제와 얼마만큼 아는지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커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맥주는 또 어떠한가. 먼저 맥주라고 하면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멜빵바지를 입고 모자를 쓴 배가 살짝 나온 인심 좋은 웃음의 독일 아저씨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맥주 생산량의 가장 첫 번째에 놓이는 나라가 바로 독일이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엄격한 맥주 순수령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이트나 카스, 테라 이상을 떠올리기 어려운 우리와 달리 5,000개 이상의 자국 브랜드도 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이 맥주 애호가 독일사람들이 안주로는 혹시 무엇을 먹고 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가. 그럴 것이다. 독일사람들에게 맥주는 음료이자 음식이다. 말하자면 '물로 된 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별다른 음식을 곁들이지 않는 것이다(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바이에른 사람들은 맥주를 마실 때 백소세지를 함께 먹는다).


맥주로 둘째라고 하면 서러울(실제 생산량도 독일에 이어 2위이다) 영국으로 건너가 보자. 우리는 흔히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가 영국의 국민요리라거나 대중적인 안주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영국사람들은 퇴근 후에 곧장 펍pub으로 달려가 술'만을' 마신다. 물론 그것은 김빠진 느낌의 에일ale이고, 우리가 흔히 마시는 라거lager는 아니지만, 그네들은 어쨌거나 맥주만을 마신다. 역시 영국인의 술자리에서 안주를 찾기는 어렵다. 6시부터 달리고 달려 밤 늦게까지 마시고 나서 출출한 속을 채우기 위해 약간의 요기거리를 찾는 것이 그들의 술문화다.


그런데 우리는 안주 없이는 잘 술을 먹지 않는다. 소주에는 계란말이나 알탕이, 맥주에는 적어도 프렌치 프라나 나쵸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뿐인가. 막걸리에는 응당 파전이 얼울린다. "깡소주"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음주력飮酒力이 극에 달한 적잖은 내공을 가진 분들의 전유물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을런지 모른다. '막걸리에는 파전'인가, '파전에는 막걸리'인가. 무엇이 앞에 나오는가. 그렇다. 파전이 먼저이다. 파전이라고 하면 막걸리가 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입이,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문화이다. 우리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는 반주盤酒를 즐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복잡하게 독일이나 영국에서 맥주를 어떻게 마시는지를 따질 것 없이 맥주도 반주를 하는 것이 우리 문화라고 하면 간단하지 않은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또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와인으로 넘어가 보자. 와인의 종주국인 이탈리아에서는 반드시 음식과 함께,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을 마시는 것이 전통이다. 음식이 없이는 와인을 마시지 않고, 기본적으로 와인은 음식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전통은 별다른 돈벌이 없이 부모님 집에서 살며 숙식을 해결하는 젊은 층들에 의해 분해되는 부분도 있다). 식사와 함께 한 잔의 와인을 곁들이는 것이 문화인 이 나라에서는 식사 후에 노래를 부르며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음주운전으로 잡혀가는 일은 좀처럼 없다. 나는 항상 그래왔듯이 식사를 했을 뿐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지독하게 DNA 속에 반주문화가 박혀 있는 나라가 이탈리아인지라, 애초에 와인을 특별히 술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햄버거를 먹는데 콜라가 없다고 할 때의 느낌과 비슷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우리는 또 어떤가. 와인을 잔에 따른 후 잔을 들어 불에 비추어 색을 확인하고 절묘하게 와인이 잔을 튀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힘차게 와인잔을 돌리고 '호로로로'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안에서 와인을 굴린 후에서야 비로소 와인이 목젖을 지나도록 허용하지 않는가. 그것이 "제대로 된" 방법이라고 배우고 있지 않은가. 마치 비빔밥을 먹는데 콩나물과 지단, 나물을 하나하나 젓가락으로 뒤적 거린 후 하나씩 집어 내어 그릇에 올린 후 맛을 보는 듯한 이런 괴상한, 매너 없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와인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다(애초에 그게 심각한 결례라는 점도 모른 채). 그런 생각의 연장에서는 이 고귀한 와인맛을 방해하는 음식은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겨질 수 밖에 없을게다. 어우러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고상한 와인평가가 끝난 후에야 가능한 것일지어서, 본고장에서의 그 어우러짐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유럽사람들의 이주 직후 적당한 포도밭을 찾기가 어려웠던 미국 초기 개척에서의 습관이 현재까지 이어져 특별한 날 귀하게 와인만을 즐기는 문화가 우리에게 전파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애초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만들어 둔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하였을 뿐, 포도가 자라기 좋은 지형이나 환경을 찾아 헤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와인이 아니라 미국을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위스키의 나라 스코틀랜드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Never have whisky without water, never have water without whisky.' 물 없이는 위스키를 마시지 말고, 위스키 없이는 물을 마시지 마라는 의미다. 뒷부분의 문장은 그야말로 호기롭게 술판을 접수하는 꽤나 잔뼈가 굵은 술꾼 아저씨께서나 하실 수 있는, 그 와이프분이 계시다면 그야말로 '등짝에 불이 날' 법한, '남자는 영원히 애'라는 반박하기 어려운 말을 더 수긍하게 만드는 호방한 말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앞 부분이다. 실제 스코틀랜드에서는 법에 따라 40도를 맞춰 나오는 위스키에 약간의 물을 타서 36~37도 정도로 도수를 떨어뜨려 마신다. 그렇지 않고서는 혀가 마비되어 무슨 "위스키의 참맛" 따위를 느끼기 보다는 고통 속에 억지로 '어른의 맛'을 견뎌야 한다. 뭔가 이상한가? 그렇다. 지금까지 당신이 마신 위스키는 마치 설탕을 넣지 않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을 보며 놀랍게 쳐다보는 이탈리아 사람처럼, 스코틀랜드 사람의 시각에서는 불필요한 혀에 대한 고문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까지 얘기를 하고 보니 홍차를 빠뜨릴 수도 없겠다. 홍차紅茶는 그 한자 이름과 달리 영어로는 블랙티black tea, 즉 검은색 차라고 한다. 이는 우린 찻물이 검은 색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 재료인 잎이 진득히 발효되어 검정색에 가까운 어두움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차의 나라인 영국에서는 블랙티를 블랙티로 마시지 않는다. 화이트white 티, 다른 표현으로는 밀크티milk tea로 마신다.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어 저으면 마치 종일 비가 내려 우중충해진 구름색과 같아져 이는 실은 회색grey이라 불러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얀색' 옷을 입은 것이 홍차가 한국으로 장가오기 전까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는 "홍차 본연의 맛을 즐기기 위해" 아무것도 넣지 않고 순수한 블랙티로 즐기거나 티백을 4개씩이나 넣어 밀크팬에 자글자글 끓여 인도의 차이티chai tea처럼 진득하게 따라 내는 것이 하나의 전범典範처럼 칭송되는 우리나라의 차음용 방식과는 참으로 다르다.




우리 소비의 진짜 모습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처럼 문화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소비"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에서 그친다. 한편으로는 면을 사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성 탓에 프랑스 요리보다 훨씬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이탈리아 요리집들이 취급하는 그 전통은, 실은 정말 이탈리아의 전통은 아니고 여러 나라를 정복하며 합쳐 만든 로마인의 레시피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차피 '원조'라는 것은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어디서 어떻게 왔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우리 방식으로 소화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닌지, 왜 자꾸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소화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어정쩡하게 합쳐지고 요상하게 버무러진 것을 마치 '원래의 그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마치 남의 것을 우리 것인양 여기며 만족한다. 먼저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문화소비 방식은 앞서 말한 것처럼 책은 사지만 읽지는 않는, 껍데기만을 놓고 마음이 풍족해지는 꼴과 다를 바가 없다. 허연 살이 드러날 때까지 파 먹을 수 있는 수박들을 몇 입 베어 물고서 버리는 것은 소비가 아니라 낭비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소비는 바로 그런 낭비에 가까운 것이다.


낭비는 -바람직하지는 않지마는 이미 그 맛을, 가치를 충분히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다른 곳에서 받아온 것들을 충분히 음미하고는 있을까. 그러한 음미가 없이 그런 날 것들을 정말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는 있을까. 실은 낭비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조차 부당하고, 어쩌면 우리는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옷들을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정도인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단지 마실 것에만 그 '낭비' 또는 '큰 옷'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솔직하게 실은 우리는 다른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하는 것을 즐길 뿐이고,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자기고백에도 귀가 기울여 진다. 그리고 그 고백의 내용은 음료를 넘어 우리 삶의 방식에도 발언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대주의事大主義는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나 외교의 특정 현안들에 대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그리고 전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여전히 우리 삶에 뿌리를 내리고 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행동이 문화가 되는 과정

문화文化라는 말을 뜯어보면, '어떤 무언가'가 글文로 대표되는 정보와 지식체계로 변화化하였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어떤 무언가'에는 행동이, 습관이 들어가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즉 문화란 일정한 행동들이 쌓여 그 사회가 용인하는 지식과 정보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소비"문화"는 이처럼 남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소비문화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낳고 있다. 남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사대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문제가 사대주의가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답이 다시금 무비판적으로 나누어 버리는 문제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대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행동의 의미를 모른 채로, 곱씹어 보지 않은 채로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것이다. 사대주의라는 굴레를 씌우기 전에 그 자체로 그것은 바람직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도 바쁜데, 이 새로운 행동양식은 벌써 우리 삶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즉 이 새로운 '행동'이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 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누구나 인정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종전에는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버릇, 경향을 가진 정도였기에(이런 것을 우리는 'OO주의主義'라고 부르고 있다) 의식하고 경계할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우리 삶의 일부로 편입되어 버린 것이다.


한 번 문화라는 이름이 주어진 후에는 쉽사리 그것을 비판하거나 걷어내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해당 사회집단의 수준은 그 문화로 가늠된다. 문화는 그 집단의 삶을 밝히는(明)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즉 문명文明은 문화를 통해 밝혀지고 이룩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새로운 문화의 이름이 '사대문화'라면, 썩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 문명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점도, 앞으로 우리가 얻을 새로운 문화들의 수준도 그저 그럴 것이라는 점이 그 네 글자로 단박에 판단 되어버릴 것이다.


이제 입이 아니라 머리로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쯤 생각해 볼 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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