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퇴사계획 - 17

"쉬는 김에 푹 쉬어 가는 것도 방법이야"

by 채움

마지막 글을 남긴 이후, 내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내 커리어에 영향을 준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 깊이 고민했다.

'정말 회사가 답일까?'
'이게 기획자로서의 끝은 아닐까?'

이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민이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이유는

재직 중에도 너무 자주 오기까지 했던 이직제의가

내 마지막 회사를 퇴사하면서 뚝 끊겼고,

이력서를 넣어도 반응 오는 곳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게 회사생활을 했는데 다시 신입사원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나는 신입이 아니었다.

높은 연봉과 긴 경력이 있었고,

그걸 내려놓기도, 더 끌어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앞서 커리어를 살아낸
여성 리더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어떻게 20년, 30년씩 일할 수 있었을까.
나와 비슷한 터널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나는 집요하게 물었다.
그리고 나에게서 또 다른 내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갖은 질문에 각각 다른 리더들은 편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너 늦은 거 아니야.

지금이 한창 활발하게 일할 때야."


그 말이 따뜻하게 다가왔지만,

내가 그렇게 집요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성에게 존재하는 유리천장,

가족계획, 미래계획에 변수가 생길 것이라는 부담감,

이 것만으로 두려운데 이걸 회사가 의심한다.

그리고 나의 기회가 이로 인해 차단된다.


쉽게 말해,

"너 뽑아 놓으면 결혼/출산/육아 때문에 쉴 거잖아. 나갈 거잖아."

"너는 남편이 생기면 간절하게 회사에 매달리지 않을 거잖아."

이런 식의 눈초리다.

(이러면 안 되지만 솔직히 일하면서 들어본 적 있는 말이다.)

내가 지원서를 넣은 회사에서도 그렇게 생각할지,

그래서 내 이직이 이렇게 늦어지는 건지 하는 의심이 생겼다.


그래서 여성 리더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한 것도 있다.




내가 마지막 직장을 다닐 때 전사 리더 회의에 2주에 한 번씩 참여했을 때이다.

당시 우리 제품은 회사 경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제품을 구매하려는 곳에서는 까다롭게 검증절차를 거치곤 했다.


어느 금융사에서 우리 제품으로 변경 도입을 고려했을 때이다.

나는 시기상으로 제품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판매에는 아직 이르며, 이를 고객사에 상세히 설명 후 계약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회의에서 영업팀의 다 저들이 알아서 한다는 말에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다음 회의에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담당자가 노처녀라 깐깐하더라고."

웃고 있는 그 임원은 그 말이 잘도 말이라 지껄였다.


그 말은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제품 검증은 당연히 깐깐해야 한다.
그게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노총각이었다면, 유부남이었다면?

그는 고객사를 향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겉으론 웃고 있었겠지만,
속으론 ‘쟤는 노처녀니까 까다롭다’는 무시감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신뢰를 주는 제품을 판다는 말인가.

그리고 나와의 업무 속에서도 저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경험이 반복되자,

나는 이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외부의 평가 하나로 커리어가 꺾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무섭고 아찔했다.




생각이 이쯤까지 마치자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할 용기가 안 났다.

노트북만 쳐다봐도 그냥 마음속이 묵직했다.

'그만할까....'


그 와중에 여성 리더들은 웃으며 조언했다.

"쉬는 김에 더 쉬어도 돼. 전체 커리어에서 지금 이 시기는 종이 한 장 정도야."


그들의 웃음엔 조금의 조급함도 거짓위안 같은 것도 없었다.

경험에서 우러난 진짜 조언이었다.

그래서 난 푹 좀 쉬었다.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3개월 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 안에서만 아주 조용히 무언가가 바뀌고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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