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이게 아니었는데
기획자의 퇴사계획이라는 제목은 원래 이렇게 끝나야 했다.
여러 절차를 거쳐 마침내 경제적 자유를 이룬 기획자.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하지만, 그 결말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한 번에 오래 재직할 수 있는 회사를 만난다.
운 좋게 일하고 좋은 동료, 늘 같은 얼굴을 만나며 성장한다.
그렇게 10년, 20년 착실하게 근무하다가 금융투자도 성공하고,
원하는 지역에 부동산을 매매해 안정적인 삶을 산다.
반면, 내 기획자의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때론 퇴사의지가 없어도 회사를 나와야 했고
원치 않게 사랑하는 동료들과 헤어져야 했다.
연봉은 계속 올랐지만, 그만큼 해내야 할 기대와 책임도 커졌다.
묵묵하게, 거북이처럼.
그렇게 12년을 버텼지만…
지금 나에게 무엇이 남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 앞의 길이,
내가 걸어온 길보다 길었으면 하는 바람뿐.
그래서 지금도 나는 새로운 둥지를 찾고 있다.
억지로 퇴사하게 된 마지막 회사를 떠올리며
그 아쉬움을 조금은 뒤로하고
내가 해오던 일의 연장선에서
나를 받아줄 회사를 찾는 중이다.
그런데 이번엔 마음이 잘 따라주지 않는다.
너무 무성의한 상태로 무지성 지원을 했고,
예상대로 거절의 메일이 도착했다.
특히 000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번 문을 두드려 주셨기 때문에 제출해주신 이력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봤습니다.
늘 말씀 드렸듯이, 님께서 쌓아오신 경험과 역량은 누구보다 훌륭하지만,
지금 당장 000에 필요로 하는 경험과 다른 점이 있어 이번에도 아쉬운 소식을 전달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후 000이 지금보다 더 빠르게 성장해서 안정기를 찾았을 때,
님의 역량에 맞는 포지션으로 다시 한번 인사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부끄러웠던 것은 메일의 본문이 너무 무지성으로 지원한 것에 대한 일침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채용사이트가 정말 잘 기획-개발되어 있다.
사용하기 편리하고, 로딩도 안걸리고, 에러도 없다.
예전만해도 채용사이트마다 각각의 포맷이 있고
홈페이지 직접지원이면 회사마다의 포맷이 또 있고
IT같은 경우는 직무 성격이 다르면 또 각각의 포맷으로 작성하고
포트폴리오도 PPT로 하나하나 수정해서 지원을 해야 했다.
그러나 요즘의 채용시장은 다르다.
플랫폼 당 하나의 포맷을 작성해서 여러 곳 지원도 가능하고,
홈페이지 자체지원하는 곳도 마이다스아이티 등
업체가 채용플랫폼과 제휴를 맺어 포맷 자체를 통일한다.
한창 작성 중 임시저장 버튼을 한 번 씩 눌러 잘 저장되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고,
다 쓰고 제출 버튼을 눌렀는데 오류가 떠서 처음부터 재작성 해야 하는 일도 없다.
예전 같았으면 포맷마다 수정하고,
회사마다 별도 제출 양식을 맞추느라
매번 공들여 지원했을 텐데…
지금은 너무 편하니까,
‘지원’ 자체가 너무 쉬워졌다.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눌렀던 것 같다.
나도 예전에 채용을 담당했던 입장에서,
같은 지원자가 명백한 결격 사유에도 자꾸 지원하면
기분 좋지 않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그 ‘싫은 지원자’가 되었더라.
마음이 급하다는 이유로,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회사는 정중하게 “좋은 포지션으로 다시 인사드리겠다”고 했지만,
이 회사와 나의 인연은 앞으로 강산이 변해도 없을 것 같다.
기억할게. 000회사야.
이 무지성 지원을 끝으로,
이제는 진짜 내 강점을 어필할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를 불태울 시간이다.
다음 불꽃이 어디서 시작될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