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필요할 때 함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나에게.
사직서를 쓰면서,
나를 ‘엄마’라고 부르던 팀원들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았다.
우리가 다시 열어보지 않을지도 모를 단체 대화방에 조용히 진심을 남겼다.
'미안합니다. 가장 필요한 때에 함께하지 못해서.
더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고, 필요할 때 언제든 서로 연락해요.'
무척 현실적이고 인생이 바쁜 팀원들 답게 끈끈한 답은 없었지만..
몇 년을 죽을힘 다해 노력한 결과가 이간질과 정치질이라니.
무에서 유를 창조하겠다는 마음으로 키운 제품과의 이별이라니.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세상 허탈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내가 더 받은 건?
스톡옵션도, 보너스도 아닌 단 3일 유급휴가였다.
그래도 그 제품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걸고 만든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텼으니까.
허탈한 마음을 두고 나는 시간을 조금 가지기로 했다.
바로 다시 취업을 하는 것이 아닌 나를 정비하는 시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쉬면서 멘토처럼 조언을 듣던 대표님들을 만나고,
대구에 있는 절친한 언니도 만나러 갈 예정이다.
그동안은 엄두도 못 낸 해외여행도 도전해 볼 예정이다.
아예 어학연수를 3개월쯤 다녀올까도 싶다.
1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내 가장 친한 친구도 보고,
오랜만에 먼지 앉은 전기톱을 좀 꺼내 내가 좋아하는 목수 일도 조금 할 예정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처럼 세어보니 할 일이 많다.
그동안 ‘일’을 위해, 나의 삶을 얼마나 덜어냈는지.
사실 지원할 곳도 없다.
경제가 어려운 탓인지, 이 업계도 갈 데까지 갔는지.
도통 이상한 회사들이 너무 많다.
기업평을 보면
“사람 대접을 안 한다”
“특정 경영진이 휘두른다”
“수시로 야근” …
그동안 수많은 회사를 경험한 기획자 입장에서
이젠 회사의 분위기나 체계를 대충 눈치챌 수 있다.
그동안 1천 개 이상의 기업을 관리하고 만나고 지원하고
경험을 통해 미루어보아 업체들의 행태가 뻔히 보였다.
게다가 요즘은 AI 붐이라며 경험 있는 기획자를 찾지만
정작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단지 “우리도 해보자”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편,
가고 싶은 회사는 ‘고스펙’만 뽑고,
내게 연락 오는 회사는 애매하거나,
사내 문화가 기상천외하다.
10년이 넘으면 전문가가 된다던데.
나는 10년이 넘어 무(無)가 되었다.
당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생각만 맴돈다.
그래도 운이 좋으면 쉬는 동안 방향을 찾게 될 테고,
아니면… 기획자로서의 퇴사도 생각보다 빠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동안 무에서 유를 창조해온 기획자였는데.
진짜 아무것도 안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