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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ta Penas_

고통의 망각

by 봄눈

10년이 넘는 나의 오랜 보스턴 유학 생활을 가만히 되돌아 보면

9할의 고난과 1할의 기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족한 영어로 해결해야 했던 집 계약, 이사, 하우스 키핑 등의 행정적인 일들.

알게 모르게 계속 드리웠던 인종차별의 그늘.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밤을 새며 페이퍼와 수업을 준비하던 시간.


그리고.. 다행히 이따금씩 찾아왔던 성취와 사랑의 기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스턴 생활을 회고할 때 가장 먼저 기억나는 이미지는

그 수 많은 고통도 찰나의 기쁨도 아닌 하나의 나른하고 짧은 에피소드이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08년의 어느 가을 날.

신호등이 없던 횡단보도를 건널 때 차가 달려 오길래

나는 차가 지나갈 때까지 횡단보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나가길 바라던 차는 지나가지 않고 갑자기 멈춰서서

운전자 아저씨는 차 유리를 내리고 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는 그냥 건너면 되는 거야. 차가 멈추는 거야. (찡긋)


햇살이 가득하던 그 가을날

너무나 별일 아니었던 그 장면이

내가 보스턴을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것은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두근거린 것도 아니었지만

뭐랄까 일종의 덕통사고 같은 느낌이었다.


보스턴 한복판에서 겪은 타문화와의 덕통사고.


자연스럽고 의외이며 약간은 느끼하고 결국엔 위안을 주었던 그 한마디가

변화를 두려워하고 새로운 생활에 낯 가리던 나에게

‘아 조금은 이곳에서 스윗하게 살아볼 만 한가’하는 옅은 미소를 남겨주었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나에겐 왜 이 기억이 지배적일까.

어느 날 길을 건너다 생겨난 이 1분도 안되는 짧은 기억이

과연 내 유학생활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먼저 언급했듯이 나는 대부분의 생활을 힘들게 공부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그 본질을 굳이 정의하자면 행복보단 고난,

나는 사실은 아주 멀고 힘든 길을 뛰어왔다.

그런데 그 고통의 감정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들은 기억이 나는데 그 때 내 몸의 장기들이 느꼈던 고통이 잘 기억이 안 난다.

내 몸이 기억했던 그 고통의 감정과 흔적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것은 행복으로 둔갑하지도 않았고

억지로 부풀려져 내 안에 대단한 서사가 되지도 않았다.

힘든 시간의 파편들은 기억이라는 두 글자 안에 감정이 없이 저장되고

그 마치 꿈과 같았던 시간들을 떠올려 볼 때

블러리했던 기억들이 몽글몽글 모여서 결국엔 그 횡단보도 장면으로 되돌아 간다.


기억은 신의 선물이고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 누가 말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에게 기억과 망각의 작용은

어떤 A라는 사실이 있으면 그 "A에 대한 기억+망각=0"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지 않아도 그 때 경험한 감정들이 잊혀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연인과 어떤 카페에서 어떻게 헤어짐을 이야기했는지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 때의 그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고통의 감정들을 망각한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 고통의 감각들이 그리워졌다.

돌이켜보면 고통스러울 때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살아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아니 혹시

그 고통의 시간마저 나에게 소중해진 것일까.



아니 혹시 사실은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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