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축
이 글은 특정 전문과목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순위를 매기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저 자신이 모든 과의 임상 현실을 알지 못하며, 안다고 해도 AI의 발전 속도와 방향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독자 여러분들과 이 주제로 여러 대화들을 나누면서, "그래서 나는 어떤 과를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에 대해 정확한 예측값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판단의 도구는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글을 씁니다. 부족한 분석이지만, 각자의 상황에 맞게 비판적으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 "의사"라는 단일 범주의 한계
앞선 글들에서 "의사"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AI에 의한 변화의 구조를 분석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의사는 단일 범주가 아니다. 이미지를 판독하는 의사와 환자의 손을 잡고 임종을 함께하는 의사가 AI로 인해 겪게 될 변화의 속도와 양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사의 역할이 바뀐다"는 문장은, 어떤 의사인지를 특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전문과목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 과는 안전하다, 이 과는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 과의 임상 현실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며, 외부에서의 단정적 예측은 오만에 가깝다. 대신, AI에 의한 역할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축들을 제시하고, 각자가 자신의 과를 그 축 위에 놓아보는 방식을 택한다.
1. 네 개의 축
AI에 의한 역할 변화의 속도를 결정하는 구조적 요인을 분석하면, 네 개의 축으로 정리할 수 있다. 데이터 정형화의 정도, 물리적 개입의 필요성, 의사결정의 불확실성 수준, 그리고 관계의 치료적 기능이다. 각 축은 독립적이지만, 특정 과에서는 여러 축이 동시에 작용한다. 중요한 것은 각 축이 "현재 AI가 얼마나 잘하는가"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2. 첫 번째 축: 데이터 정형화의 정도
AI가 가장 빠르게 침투하는 영역은 입력 데이터가 정형화되어 있는 곳이다. 데이터가 디지털화되어 있고, 형식의 표준화가 잘 돼있으며, 또한 데이터가 대량으로 존재하는 경우, AI의 패턴 인식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이미지, 수치 등의 정형화된 데이터를 주로 다루는 과일수록 이 축에서 충격이 먼저 도달하는 쪽에 위치한다.
반대쪽에는 데이터가 환자의 서사, 맥락, 비언어적 신호처럼 비정형적인 정보들로 이루어진 과가 있다. 이런 데이터는 디지털화 자체가 어렵고, 표준화된 형식으로 변환하면 핵심 정보가 손실된다.
다만 이 축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현재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구조적으로 구조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르다. 자연어 처리와 음성 분석의 발전으로, 현재 비구조적이라고 여겨지는 데이터가 향후 구조화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 따라서 이 축은 변화의 순서를 가늠하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변화의 최종 범위를 예측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3. 두 번째 축: 물리적 개입의 필요성
앞선 글에서 외과 수술 자동화의 병목을 데이터 분절로 분석한 바 있다. 이 분석을 확장하면, 신체에 대한 물리적 접촉이 얼마나 필수적인가가 변화의 속도를 결정하는 독립적인 축이 된다.
물리적 개입이 핵심인 과일수록 로봇 자동화의 장벽이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여기서 앞선 글의 분석을 상기하면, 같은 물리적 개입이라도 정형화된 수술처럼 중심 플랫폼이 존재하여 데이터가 집중되는 영역과, 간단한 시술처럼 장비가 파편화되어 데이터가 분산되는 영역의 자동화 속도는 다르다. 물리적 개입의 양이 아니라 데이터 집중의 구조가 자동화 속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손을 많이 쓰는 과가 안전하다"는 직관은 부정확할 수 있다.
반대쪽에는 환자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진료의 핵심이 수행 가능한 과가 있다. 이 축에서 접촉이 낮은 쪽에 위치한 과는, 원격의료와 AI의 결합이 비교적 빠르게 침투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4. 세 번째 축: 의사결정의 불확실성 수준
같은 진단명이라도, 어떤 과에서는 프로토콜에 따른 의사결정이 지배적이고, 어떤 과에서는 높은 불확실성 하에서의 판단이 핵심이다.
프로토콜이 지배적인 의사결정이란, 진단이 내려지면 치료 경로가 비교적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경우이다. 가이드라인이 잘 확립되어 있고, 의사의 재량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런 영역에서 AI는 가이드라인을 완벽하게 준수하는 시스템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인간 의사보다 일관성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다.
반면 높은 불확실성 하의 의사결정이란, 진단 자체가 불확실하거나, 여러 동반 질환이 복잡하게 얽혀 있거나, 환자의 가치관과 선호에 따라 최적의 치료가 달라지는 경우이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으며, 의사의 역할은 불확실성 자체를 환자와 공유하고 함께 결정하는 것에 가깝다. 치료를 계속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어떤 부작용을 감수하고 어떤 삶의 질을 우선할 것인가. 이런 판단은 의학적 지식과 환자의 가치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앞선 글에서 다룬 검증 병목의 "사전 책임"과 연결하면, 불확실성이 높은 의사결정일수록 책임의 무게가 커지고, 이 책임을 AI에 귀속시키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워진다. 진료에서의 책임은 확립된 치료의 결과에 대한 사후 배상의 문제이지만, 불확실성이 높은 판단에서의 책임은 "이 선택을 해도 되는가"라는 사전 판단 자체에 대한 것이다. 사후 책임은 보험과 법적 프레임워크로 처리할 수 있지만, 사전 책임은 그 구조로 해소되지 않는다. 따라서 불확실성 축에서 높은 쪽에 위치한 과일수록, 현재의 역할이 가장 오래 유지되는 쪽에 놓인다.
5. 네 번째 축: 관계의 치료적 기능
어떤 과에서는 의사-환자 관계 자체가 치료의 일부이다. 첫 글에서 심리적 병목의 가장 깊은 층으로 "존재론적 불안"을 다룬 바 있는데, 이 층이 가장 두껍게 작용하는 곳이 바로 관계가 치료적 기능을 가지는 과이다.
치료적 동맹, 장기적 신뢰, 임종 동행. 이런 관계에서 의사의 존재는 정보 전달이나 의사결정 보조를 넘어서, 환자의 경험 자체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반대쪽에는 환자와의 관계가 일회성이고, 의사의 역할이 기술적 판단에 집중되는 과가 있다.
이 축은 다른 축들과 달리, AI 기술의 발전에 의해 좁혀지는 속도가 가장 느리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감각을 AI가 제공할 수 있는지는 기술적 문제라기보다 인간 조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도 첫 글의 분석을 상기해야 한다. 이 심리적 병목은 "영구적"이 아니라 "가장 오래 남을 잔류물"이다. 어렸을 때부터 AI와 함께 자라난 현 세대의 아이들이 병원의 주요 고객이 될 무렵에는, 시공간의 제약 없이 제공되는 AI 기반의 체계적인 정서 관리를 환자들이 오히려 선호하게 될 수도 있다.
7. 축의 교차, 그리고 이 프레임워크의 한계
네 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데이터 정형화 정도: 정형화되어 있을수록 변화가 빠름.
˙물리적 개입의 필요성: 물리적 개입이 클수록 변화가 느림. 단, 데이터 집중 구조에 따라 역전 가능.
˙의사결정의 불확실성: 불확실성이 높을수록 현재의 역할이 오래 유지됨.
˙관계의 치료적 기능: 관계가 치료의 일부일수록 현재의 역할이 오래 유지됨.
이 축들은 독립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특정 과에서 AI가 가져올 변화의 속도는 네 축의 교차점에서 결정된다. 어떤 과는 네 축 모두에서 변화가 빠른 쪽에 위치할 것이고, 어떤 과는 모두 느린 쪽에 위치할 것이며, 많은 과에서는 축들이 서로 상충하는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축들이 상충하는 경우, 어떤 축이 지배적인지에 따라 변화의 양상이 달라지며, 이것이 단순한 예측을 어렵게 만든다.
이 프레임워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네 개의 축은 하나의 관점이지, 완전한 목록이 아니다. 각 과의 내부에는 이 축들로 포착되지 않는 고유한 맥락이 있을 것이며, 그 맥락은 해당 과에 있는 분들만이 판단할 수 있다. 실제 임상에서 의사가 하는 일 중 상당 부분, 예컨대 환자 가족과의 협상, 다학제 팀 내에서의 조율,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의 트리아지, 환자와 함께 의사결정을 만들어가는 과정 같은 것들은, 이 축들로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영역이다. 이 도구는 출발점이지 결론이 아니다.
그리고 이 네 축 위에는 두 가지 외부 변수가 겹친다. 첫째, 수가와 경제적 압력이다. 앞선 글에서 의료 비용 위기가 AI 도입을 가속한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 이 압력은 과별로 다르게 작용한다. 수가가 높고 보험사 입장에서 비용 절감 효과가 큰 영역일수록 AI 도입의 경제적 동기가 강해진다. 네 축에서 변화가 느린 쪽에 위치하더라도, 경제적 압력이 강하면 전환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둘째, 과별 학회의 정치적 방어력이다. 첫 글에서 의사 집단의 정치경제학이 전환 시점을 조절하는 변수라고 분석했는데, 학회의 규모, 로비력, 규제 기관과의 관계는 과마다 다를 것이다. 기술적으로 변화가 가능해지더라도, 강력한 학회가 규제 방어선을 유지하는 과에서는 실제 전환이 지연될 수 있다. 다만 이 방어 역시 영구적이지 않다는 점은 첫 글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8. 축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것은, 이 네 축 자체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다. 앞선 글들에서 반복적으로 다룬 것처럼, 현재의 장벽이 영구적이라고 가정하면 안 된다.
자연어 처리 기술의 발전은 비구조적 데이터를 구조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실제로 몇몇 분야에서는 팔란티어와 같은 기업의 데이터 통합·분석 플랫폼에서 이러한 접근이 활용되고 있다. 인튜이티브 서지컬과 같은 로봇 기술의 발전은 물리적 개입의 자동화를 진전시킨다. AI의 불확실성 하 의사결정 능력은 다중 AI agent 체계의 발전으로 인해 점진적으로 향상된다. AI의 공감 시뮬레이션 능력은 관계의 치료적 기능을 침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변화들의 속도가 축마다 극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핵심이다. 데이터 구조화는 이미 빠르게 진행 중이지만, 관계의 치료적 기능은 기술 발전의 속도와 무관하게 인간의 조건에 묶여 있다. 이 속도 차이가 과별 변화의 타임라인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가 곧 각 과에 주어지는 윈도우의 크기이다.
9. 결론
어떤 과가 살아남는가. 이 질문에 단정적으로 답하는 것은 이 글이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아니다. 각 과의 미래는 그 과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판단해야 하며, 이 글은 그 판단을 위한 하나의 도구를 제안할 뿐이다.
다만 몇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네 축 모두에서 변화가 먼저 도달하는 쪽에 위치한 과의 의사에게는 윈도우가 짧다. 앞선 글에서 다룬 환전 전략이 더 긴급하다. 네 축 중 하나라도 현재의 역할이 오래 유지되는 쪽에 강하게 위치한 과는 윈도우가 길다. 그러나 긴 윈도우를 안정기로 착각하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라는 점은 이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경고이다.
자신의 과를 네 축 위에 놓아보는 것이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위치가 알려주는 윈도우의 크기 안에서, 무엇을 확보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도착점이다.
다만, 어떤 과를 선택하든 마지막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현재의 의학 교육 시스템이 AI 시대의 의사를 만들 수 있는가. 개인이 아무리 최적의 과를 선택하고 최적의 전략을 세우더라도, 그 개인을 양성하는 교육 시스템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다음 글에서 이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