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이념이 없는 사회

일본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

by 쿨파스

오늘날 일본인들은 예의 바르고 온화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로 전 세계에서 호평받는 국민이다. 거리는 깨끗하고, 낯선 이에게도 공손하게 인사하며, 줄을 서는 데에도 질서를 잘 지킨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과거 역사 속에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침략과 잔혹한 전쟁 범죄, 혹은 임진왜란 시기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과 납치—를 떠올리면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저렇게 예의 바른 민족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은, 일본 사회의 표면과 내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보여준다. 이 괴리의 핵심에는 ‘철학의 부재’라는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인 중 상당수는 일본의 질서정연함을 ‘선진국이기에 가능한 시민의식’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서구적 시민의식과 일본의 질서 유지 방식은 출발점과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으로도 닮은 점이 많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에는 큰 차이가 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고, 정치의 목적을 백성을 위한 것이라 여겼다. 억울한 백성은 임금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고, ‘민심은 천심’이라는 관념은 정치 윤리의 중심이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는 ‘정치는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공감대가 뚜렷하다. 이는 정치가 잘 작동하느냐와는 별개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의 합의가 있다는 뜻이다.


일본에서 오래 살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많은 일본인들이 ‘민본(民本)’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정치든 문화든 그 바탕에 ‘백성이 중심’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심지어 농악 공연을 해도 무대 한켠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지 과거 유교 사회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한국인들이 무의식적으로 공유하는 ‘사회란 국민을 위한 것이다’라는 기본 전제의 표현이다. 반면 일본 사회에는 이러한 민본적 관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나 권력은 백성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질서 유지를 위한 중심축으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의 유무가 삶의 감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조선 시대 백성들은 억울함을 당했을 때 임금에게 신문고를 쳐서 직접 호소할 수 있었고, 상소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펼칠 수 있었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국민신문고’ 제도, 또는 일반 시민이나 사회적 약자가 청와대 게시판이나 SNS에 글을 올리고 언론이 이를 보도하는 구조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살아 있는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쇼군에게 직접 호소하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에도 막부는 무사 계급 간 질서를 조정하고 유지하는 데 집중했으며, 백성은 각 영주의 소유물이었다. 억울함을 쇼군에게 호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일본은 유교를 일부 받아들였지만, 인(仁)과 효(孝)는 제거하고 충(忠)과 의(義)만 강조했다. 이는 백성을 위한 정치 철학이 아니라 무사 내부 서열 유지에 최적화된 윤리였다. ‘무사의 길은 죽음에 있다’는 말처럼 일본 사회는 개인의 양심보다 집단의 질서와 체면을 우선했다.


이런 일본의 특성은 결코 현대에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조선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이나 임진왜란 때 납치된 강항이 쓴 『간양록』 같은 역사 자료에서도 이미 일본 사회의 이질적인 질서 유지 방식이 확인된다. 당시 일본 사회가 ‘서구적 시민의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고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사회는 윤리나 철학에 기반하지 않고, ‘질서’와 ‘충성’으로 움직인다. 전쟁 중에는 천황에 대한 충성이 생명보다 우선했고, 그 결과 잔혹 행위가 가능했다. 일본인은 명령과 질서가 바뀌면 그에 따라 행동하는 구조다. 철학적 자기성찰이나 보편적 인간 존엄 개념이 약하기 때문에, 잔혹성과 온화함이 한 사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홍익인간’과 같은 이념을 바탕으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끌어안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데 반해, 일본은 애초에 그런 기준점 자체가 없기에 변화할 이유도, 방향도 없다. 변화하지 않음으로써 안정을 지키려는 이 구조는, 과거 쇄국 시대에는 유효했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어떤 방식이 오늘날의 사회에 더 적합한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올해 초, 오랜만에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인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과 관련된 시도에서 실패했다는 뉴스에 대해 “이게 일본이었으면 과연 실패했을까?”라고. 나는 그 질문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느꼈다. 실제로 한국의 군 지휘 체계 안에서도 적지 않은 장교와 간부들이 자신 나름의 판단과 철학에 따라 명령의 정당성 여부를 고민했고, 그로 인해 쿠데타는 결국 좌절되었다. 잘못된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것을 그대로 따르느냐, 아니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 행동을 결정하느냐 — 이 차이는 단지 정치 체제의 차이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마음속에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것이 한국과 일본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며, 단순히 정치 체제나 발전 수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근본적인 사회적 토대의 차이다. 한국은 시끄럽고 갈등이 많지만, 그 안에는 끊임없이 이상과 현실, 정의와 이익 사이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려는 움직임이 있다. 일본은 조용하고 질서정연하지만, 그 질서가 언제든 철학 없이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안정한 평화 속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일본 사회를 이해하려면, 왜 그렇게 행동하느냐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없기에 그렇게 되는가? 그리고 그 핵심은, 단순한 문화나 전통이 아니라 ‘철학의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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