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간의 근본적 차이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
한국인들 중에는 아직도 일본이 한국보다 모든 면에서 앞선 월등한 선진국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일본에서 생활하던 10여 년 전, 일본 정부에 제출된 보고서에 "한국의 문화 예산이 1인당 기준으로 일본의 10배에 달한다"는 내용을 접하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두 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문화와 기록을 어떻게 인식하고 관리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단서이다.
한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 등 방대한 역사 기록물을 원문과 현대어 번역으로 디지털화하여 누구나 검색할 수 있는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방문객 수에서 세계 5위권에 들 만큼 규모와 콘텐츠 모두에서 국제적 수준을 자랑하며,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기 신문 자료까지도 원문 이미지와 본문 텍스트를 통합 검색할 수 있는 뉴스 아카이브 시스템이 일반에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심지어 한국은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나 『고사기』 등의 국역본도 온라인에서 열람 가능하도록 구축하고 있다.
반면 현대 일본은 역사 기록물의 디지털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문 기사 조차 인터넷에서 사라진다. 과거 신문기사를 찾아보려면 국립 국회 도서관에 가거나 특정 신문사의 유료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사기』나 『일본서기』 등 고대 역사서는 존재하지만, 중세 이후 무사 정권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역사서를 편찬한 사례가 거의 없다. 『속일본기』(797), 『일본후기』(840), 『속속일본기』(901) 등은 9세기 초까지의 칙찬 역사서로, 이후는 사실상 단절되며, 막부 시대에는 공식 역사 편찬이 이뤄지지 않았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대일본사』(18세기~19세기 편찬)는 미토번에서 시작된 지방의 사적 프로젝트로, 국가 공식 사업이라 보긴 어렵다. 이는 무사 정권 하의 일본이 국가 통치보다는 무사 서열 유지와 지역 영주의 권한에 초점을 맞춘 분권적 통치 구조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와 달리 중앙집권적 문치 체제를 확립해 국가 운영 전반을 기록하고 관리했다. 육조 체제를 중심으로 이조, 호조, 병조, 예조, 형조, 공조 등 부처를 체계화하고,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등의 감찰기구를 통해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구현했다. 특히 과거제도는 능력 기반의 관료 선발 체계로, 서양에서 근대적 관료제가 등장하기 수백 년 전에 조선은 이미 공정성과 문치의 이념을 제도화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방대한 공문서와 의례 기록, 정책 결정 문서가 남겨졌고, 현재 대부분이 디지털화되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보더라도,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절들이 일본 국내 유력자들과의 공식적인 소통에서 문서로 필담을 나눌 수 있었던 대상은 일부 유학자나 불경을 읽기 위해 한문을 익힌 승려들에 한정되었다. 일본의 쇼군이나 영주 대부분은 한문을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했으며, 당대 조선의 사대부 계층과 대등한 수준의 문해력을 갖춘 이는 드물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아라이 하쿠세키처럼 조선 사절단의 주목을 받은 유학자도 있었고, 대마도주의 가신이었던 아메노모리 호슈처럼 조선어에도 능통한 인물도 있었으나, 그들은 일본 내에서도 주류 지식인 계층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사례에 불과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에도 막부에서 일시적으로 활약했으나 정치적으로 오래 가지 못했고, 아메노모리 호슈 역시 지방 번인 쓰시마번의 일개 신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에도 시대에는 지방 영주들이 정기적으로 에도에 거주해야 했던 참근교대(參勤交代) 제도가 있었는데, 오늘날 일본의 정치 구조에서 지역구를 세습하는 2세, 3세 국회의원들이 지역 후원회에 의해 "영주님의 도련님을 다시 에도(도쿄)에 보내는" 듯한 방식으로 당선되는 현실은 이 제도의 현대적 버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본 정치는 여전히 세습 구조가 강하고, 특정 명문가가 관료 및 정치 요직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창작물을 보면 현대나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내용인데도 유력 가문의 도련님한테 집사나 시종이 "-님"이라고 부르면서 시중을 드는 전근대적인 묘사가 많이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한국은 과거시험의 전통을 이어받아 20세기 후반까지 사법고시, 행정고시 등을 통해 비교적 공정한 방식으로 인재를 선발해왔다. 물론 최근에는 고시제도 폐지 및 개편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행정직 공무원이나 법조인 선발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시험 경쟁과 공개 선발의 원칙이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양반들이 특권 계층으로 거들먹거리던 악습까지 이어받은 것은 부작용이긴 하다.
이러한 시스템은 통치 철학과 국가의 투명성, 그리고 기회의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한일 양국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행정에까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일 간의 차이는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통치 철학, 행정 제도, 기록과 지식에 대한 태도와 역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왜 배우는지 여기서 명확해진다. 현재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고, 현재가 미래의 원인임을 알고 더 좋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힌트와 교훈을 얻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