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혐한 고찰

1부 - 인터넷의 등장과 모습을 드러낸 혐한

by 쿨파스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나는 일본 니가타에서 생활했다. 처음으로 일본이라는 나라에 정착해 일을 하고 일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던 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혐한'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현실감이 없었다. 물론 주변 일본인들 중에 한국에 대해 무지하거나 편견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른다’는 데서 오는 거리감이지, 노골적인 감정적 혐오와는 달랐다.


당시는 일본이 명백히 한국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가전제품, 자동차, 생활 문화, 도시 인프라까지, 어느 하나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삼성이나 LG 같은 한국 기업의 제품이 점차 해외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긴 했지만,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저가형 세탁기나 VTR 같은 보급형 제품에 불과했다. 일본인 동료들 중에는 "나는 일본제 아니면 안 산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국 제품에 대한 당연한 자부심처럼 느껴졌을 뿐, 한국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은 직장 동료가 나에게 "너도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은 있을 거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정확한 맥락은 지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이 약간 불쾌하게 들렸던 건 분명하다. 민족 정체성을 당연히 전제하고 말하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 깔린 미묘한 우월감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내가 느낀 혐한의 거의 전부였다. 니가타에서의 그 몇 년 동안, 나는 ‘혐한’을 거의 실감하지 못했다.


다만 일본에서 알게 된 재일교포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너는 정부가 초청한 캐나다인으로 일본에 왔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인 차별이 얼마나 지독한지 느끼지 못할 거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니가타의 3년간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니가타는 원래 북한 원산과 만경봉호가 오가고 있는 항구도시였다. 홋카이도 오타루까지 부모님과 니가타항에서 페리로 갔을 때 바로 옆에 만경봉호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북한이 일본 근처로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고 북한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면서 치마 저고리 교복으로 통학을 하던 재일교포 조선학교 여학생들 치마를 커터칼로 찢는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 일은 있었다. 그리고 이후로 니가타에서 살 때 보던 조선학교의 치마 저고리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에게 혐한이라는 존재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만든 계기는 2001년 도쿄로 이사한 이후였다. 수도 도쿄는 니가타보다 훨씬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도시일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던 나는, 정반대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은 인터넷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던 포털사이트 ‘야후 재팬’의 게시판에서, 나는 처음으로 한국을 향한 노골적인 조롱과 혐오가 넘쳐나는 공간을 마주했다.


게시판에는 한국을 "거짓말하는 민족", "도둑 국가", "기생하는 나라" 등으로 부르는 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왔다. 단순한 비판이 아니었다. 명백한 감정적 증오였고, 구체적인 민족 정체성을 향한 멸시였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니가타에서 보았던 일본과는 너무나 다른 얼굴이었다.


그 즈음 또 하나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인터넷 공간이 있었다. 바로 ‘2채널’이라는 익명 게시판이다. 2채널은 본래 마니아적인 커뮤니티였지만, 어느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큐슈 후쿠오카에서 실제로 버스를 하이잭한 17세 소년이 2채널 게시판에 사전 예고 글을 남겼던 사건이었다. 여성 2명이 사건을 칼에 찔려 1명이 사망한 이 사건을 계기로 나 역시 2채널이라는 존재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한글/한국 게시판’이라는 항목도 보게 되었다.


그 게시판은 혐한 감정의 총집합체였다. 한국인을 희화화하고, 역사를 조작하며, 한국 사회를 비웃는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왔고, ‘우리지날(ウリジナル)’ 같은 조어가 등장했다. ‘우리지날’은 ‘우리나라’와 ‘오리지널’을 합성한 말로, 한국인이 뭐든 자기 것이 원조라고 주장한다는 조롱이었다. 대표적인 근거로 자주 언급된 것이 한국의 검도협회 홍보 문구였다. 현대 일본식 검도를 도입하면서도 “삼국시대의 검법 정신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한국이 검도도 자기 거라 우긴다”며 조롱했다.


당시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환단고기’ 같은 비주류 민족사관이 일부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런 극단적 주장이 일본 커뮤니티에 소개되며, “역사를 조작하는 민족”이라는 프레임을 더욱 강화시키는 재료가 되었다. 나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가 개선되고, 역사 문제도 좀 더 성숙하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오히려 혐한이 더욱 노골화되고, 정교해졌으며, 조롱은 놀이처럼 소비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또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 ‘엔조이 재팬’이라는 게시판에 참여하기도 했다. 네이버가 제공하던 이 서비스는 한국과 일본 유저가 자동 번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플랫폼이었는데, 나 역시 몇몇 게시판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쪽 참가자들은 대부분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본 유저 중에는 나이든 남성들이 다수 존재했고, 이들은 비교적 어린 한국 유저들을 상대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조롱하거나 비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자동 번역 시스템의 한계도 조롱의 재료가 되었다. 위안부 관련 시위 등에서 한국인이 쓴 서툰 일본어 피켓 문구나, 번역 오류로 나온 일본어 표현은 그들에게 좋은 놀림감이었다. 예컨대 ‘배상하라(賠償しろ)’가 ‘賠償しる’로 잘못 쓰인 것을 두고 “한국인은 일본어도 제대로 못 쓰면서 시위한다”고 조롱했고, 당시 유행한 한국어 감탄사 ‘헐헐’이 ‘ホルホル’로 번역된 것을 가지고 “한국인은 자화자찬에 빠져 있다”는 의미의 ‘ホルホルする’ 같은 표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조롱이 단순한 인터넷상의 말장난에 그치지 않고, 현실 정치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재특회(在特会)’였다. 이 단체는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고, 인터넷상의 허위 정보와 오해를 현실 행동으로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생활보호 수급자에 대한 공공요금 감면 같은 제도를 ‘재일교포 특권’으로 왜곡하거나, 재일교포가 평상시에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인 통명을 “일본인인 척하는 사기 행위”,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매도하는 식이다. 그 후로 일본에 무슨 범죄 뉴스가 나올 때마다, 범인이 일본인이라도 “이는 재일교포가 일본인인 척 본명을 숨기고 있다”는 댓글이 모든 범죄 관련 뉴스에 달리는 지경이 되었다.


이 단체를 만든 사쿠라이 마코토라는 인물은 과거 ‘엔조이 재팬’에서도 활동한 인물이었고, 그가 현실 정치에 등장하면서 혐한은 단순한 여론이 아니라 행동하는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초기에 일본 도쿄의 분쿄구 문화회관에서 이 재특회가 행사를 연다는 소식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지방정부가 이런 노골적인 혐오 단체에게 공공시설을 대여해 주었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가 혐오를 방관하거나 때로는 묵인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단체의 혐한 활동은 점차 과격화되어서 도쿄의 한국 거리인 신오쿠보에서 “한국인은 바퀴벌레”, “좋은 한국인이든 나쁜 한국인이든 모두 죽여라”라고 외치고,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다니는 조선학교 앞에서 “스파이의 아이들을 추방하라”는 구호를 확성기로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내게 일본 사회를 다시 보게 만든 전환점이었다. 혐한은 더 이상 인터넷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그것은 농담도, 놀이도 아닌 현실의 정치적 감정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 일본에서 취직하여 일본에 내 집까지 마련한 상황이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에 계속 머물러야 할지 중대한 고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2부에 계속)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고맥락 사회에서 저맥락 사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