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혐오의 일상화. 한국은 그 전철을 밟을 것인다.
도쿄로 이사한 지 몇 년이 지나고 아베 정권이 시작되면서, 나는 인터넷에서만 접하던 혐한이 거리로, 현실로 흘러나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2채널 같은 곳에서만 보이던 혐한의 조롱과 증오의 언설이 지하철 광고, 타블로이드 신문, 베스트셀러 서적을 통해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주간지나 와이드쇼에서도 아무런 필터 없이 "한국인은 거짓말쟁이", "삼성은 일본 기술을 훔쳤다" 같은 이야기가 공공연히 방송되었고, 출근길 서점 입구에는 "한국 붕괴" 같은 자극적인 문구의 혐한 서적이 쌓여 있었다.
더 무서웠던 건 이런 분위기에 감염된 일본인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나와 잘 지내던 사람들조차 술자리에서 "당신은 다르지만 요즘 한국은 왜 이러냐"는 식의 발언을 하거나, 아베 총리를 극찬하거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비즈니스를 함께하던 일본 기업의 대표는 혐한 성향의 경제 평론가가 쓴 "삼성과 한국은 곧 망한다"는 류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공유했고, 다른 파트너 기업에서 우리 회사 솔루션 영업을 도와주던 엘리트 영업사원은 아베 총리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접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주변 일본인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캐나다로 돌아온 지금, 페이스북 친구로 남아 있는 일본인들 중에는 당시에 아베 정권을 분노하며 비판하던 사람들만이 남아 있다. 내가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올릴 때 애매한 태도로 슬픈 이모티콘을 눌렀던 이들은 모두 차단했다.
혐한이 한창일 때, 은행이나 병원에서 내 한국 이름이 불릴 때, 친구와 한국어로 대화할 때조차도 무의식적으로 긴장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들통나면 누군가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혐오의 눈초리로 보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실제로 재일교포들이 왜 통명을 쓰는지, 왜 자신의 뿌리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는지를 절감하는 순간들이었다. 나 역시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의 유통 및 IT 업계에 깊이 관여하면서 사회에 융화되어 살고 있었지만, 이름 하나, 사소한 말 한마디로도 경계선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론토로 돌아온 이후 내가 가장 크게 느낀 편안함 중 하나는, 한국 이름으로 살아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국 이름으로 불려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내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다.
트위터를 통해 교류하던 한 재일교포 기자는 온라인상 혐한의 표적이 되어 결국 명예훼손 소송까지 가게 되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혐오는 하나의 오락이 되었어요. 그들에게는 재미예요." 그 말은 내 머릿속에 깊게 남았다. 초기에는 잘못된 정보에 속아 그들 나름의 정의감으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증오를 퍼뜨리는 이들은 자신이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단지 재미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동질감을 나누기 위해 혐오를 소비한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반박해도, 아무리 증거를 제시해도 소용없다. 그들에게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거짓말쟁이", "한국인은 은혜도 모르는 민족" 같은 문구는 마치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되었다.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며, 어느 단계를 지나면 회복이 어려운 상태에 빠진다. 열성적인 종교 신자가 경전의 오류를 증명받아도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일본 인터넷에서는 이런 혐한 감정의 소비를 "놀이"로 정형화하는 표현도 등장했다. 예컨대 '혐한(嫌韓) → 노한(怒韓: 한국에 분노) → 돈한(呆韓: 한국에 질림) → 체한(諦韓: 한국을 포기) → 쇼한(笑韓: 한국을 비웃음)'이라는 식으로 단계를 나누고, 이를 하나의 유행처럼 소비하는 분위기였다. 이처럼 혐한은 논리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감정과 조롱의 놀이로 구조화되어 갔다.
혐오와 동시에 마약처럼 퍼진 “일본 스고이”라는 자화자찬, 그 안에서 느끼는 집단적 마비와 쾌감이야말로 일본 사회의 병리라고 느꼈다. 혐오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놀이가 되면,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누구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거기 존재하고, 점점 더 일상화된다.
윤석열 정권 이후 나는 일본에 대한 관심을 잠시 끊었다. 내가 태어난 나라가 그 모양이 되었을 때, 일본을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한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외국인 혐오, 성소수자 혐오, 특정 정치 성향에 대한 혐오, 지역감정까지. 그것은 마치 트럼프 당선 직후 미국에서 보였던 반동의 물결 같았고, 일본에서 내가 목격했던 혐오의 사회화와도 닮아 있었다. 일본에서 보아온 병폐가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막연히 기대했던 나의 희망은 산산이 무너졌다.
일본 사회가 몰락한 이유는 기술이나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기만과 혐오를 방치한 집단 심리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최고라고 착각하고, 자신들과 다른 것을 공격하면서, 결국 세계 흐름에서 뒤처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본은 철학의 부재에 귀결된다. 나는 그 전철을 한국이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혐오는 방치하면 사라지지 않는다. 혐오는 화재와 같아서, 불씨를 놔두면 언제든 타오른다. 사회는 결국 그것에 연소되고, 그을리고, 무너진다. 나는 일본에서 그것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도 그 불씨가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