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지배하는 사회를 막는 최소한의 조건
인간이 세상을 판단하는 방식에는 뚜렷한 단계가 있다. 가장 높은 단계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정의를 따져보며 공동체 전체의 선을 고려하는 판단이다. 그보다 낮은 단계는 손익을 기준으로 삼는 판단이다. 비록 도덕적 이상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합리적 계산을 통해 자기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따져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낮은 단계는 좋고 싫음을 기준으로 하는 판단이다. 이성이나 합리를 배제한 채 단순한 호오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한 방식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다수가 최소한 손익의 단계 이상에서 사고하도록 교육해야 하고, 나아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수준에 도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판단이 옳고 그름, 손익, 호오와 충돌할 때, 옳고 그름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이 손익, 마지막이 호오라는 순서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할 때 비로소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감정적 호오에 매달리고, 사회 전체가 그에 휘둘린다. 특히 혐오는 다른 감정보다 훨씬 강력하다. 일단 혐오가 자리 잡으면 사람은 옳고 그름도, 손익도 무시한 채 혐오를 충족하는 쾌감을 선택한다. 자기 자신에게 손해가 따르더라도, 사회 전체가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혐오 대상을 배척하고 조롱하는 데서 더 큰 만족을 얻는다.
일본의 넷우익이 보여주는 태도가 그렇다. 일본 사회가 외교적으로 고립되거나 기업이 손해를 입어도, 그들은 오히려 혐오의 쾌감에서 만족을 얻는다. 한국의 윤석열 지지층도 마찬가지다. 정부 실책이나 경제적 불이익이 자신의 삶을 악화시키더라도, 야당과 이재명에 대한 혐오 감정이 그것을 덮어버린다. 옳고 그름은 물론 손익조차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혐오를 표출하는 데서 정치적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드러낸다. 민주주의가 모든 이에게 동등한 한 표를 부여하는 제도임은 분명하지만, 만약 그 표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싫음에 의해 행사된다면 사회 전체는 위험에 빠진다. 이는 빨간불과 파란불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운전을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교통사고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도 파국을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정치 참여에도 최소한의 자격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지, 혹은 적어도 손익을 따져볼 수 있는지 여부는 검증되어야 한다.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러 좋고 싫음으로만 세상을 판단하는 이들의 정치적 선택은 곧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같은 실수를 반복해 온 이유는 새로운 세대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체득하지 못하고 늘 생물학적 본능인 좋고 싫음에서 다시 출발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통해 성숙한 시민을 양성해도, 지식과 경험은 유전되지 않고 세대마다 리셋된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망나니 같은 자식이 태어나기도 하는 것은 결국 성품은 유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본능으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인간의 유전자는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은 배워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존재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최소한 손익의 단계에서라도 사고하도록 교육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는 앞으로도 감정의 포로가 되어 같은 실수를 끝없이 반복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교육”과 “트레이닝”의 구별이 흐려졌다. IT시스템 사용자 트레이닝을 한국에 출장 가서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현지에서는 그것을 “교육”이라 불렀다. 단순히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과연 교육일까?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사고를 열어 주고, 옳고 그름의 우선순위를 가르쳐 주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본래 의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