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과 차별, 가짜 뉴스를 낳는 단순화된 사고
나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혐한 담론과 맞서 지낸 경험이 있다. 그 과정에서 정말 황당한 가짜 뉴스들이 어떻게 퍼져 나가고, 또 어떻게 사람들의 사고를 잠식하는지를 직접 지켜보았다. 예를 들어, 한일 합방 때 한국인 중 일부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처럼 연합 제국의 형태를 구상하며 합병을 찬성했다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 전체가 일본인이 되고 싶어했고 일본이 은혜를 베풀어 합병해 주었다”는 이야기로 둔갑했다. 또 구한말 한글 신문 발행 과정에서 일본 자본이 쓰였다는 사실이나, 일제시대 총독부의 교육 과정에 조선어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이 한글을 보급했다”는 주장으로, 더 나아가서는 “일본이 한글을 발명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넷우익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글을 발명하고 가르쳐 준 일본인”이라는 논리와, “한자를 안쓰고 한글로만 쓰는 한국인은 어리석다”는 말이 동시에 돌아다녔다. 중요한 건 앞뒤가 맞느냐가 아니라, “일본은 대단하고 한국은 어리석다”는 결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단순한 사고의 함정에 빠지는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정치적 언어가 놀라울 만큼 단순화되는 것을 본다. “민주당은 북한과 가깝다. 북한은 사탄이다. 따라서 민주당은 사탄이다.” 이런 식의 논리는 국제관계나 정책 문제의 복잡성을 단숨에 차단해 버린다. 상대를 악마로 규정해 버리면 더 이상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 정치가 종교적 흑백논리를 빌려오면 사회는 결국 이성적 논쟁 대신 혐오와 분열로 기울게 된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인간의 본능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고를 귀찮아한다는 사실이다. 깊이 생각하는 것은 힘들고, 시간이 들며, 불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인지적 지름길을 찾는다. 브랜드를 보고 물건을 사는 것도 그렇다. 본래 브랜드는 품질을 검증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장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단순히 과시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우리는 지름길을 택한다. 누군가의 인품이나 능력을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대신 학벌, 인종, 성별, 출신지 같은 표면적 속성을 근거로 단숨에 판단해 버린다. 이런 습관은 과거에는 생존에 유리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차별과 불공정으로 이어진다.
종교적 사고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와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은 끝없는 노력과 질문을 요구한다. 하지만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라는 한 문장은 그 과정을 단숨에 끝내 버린다. 신앙이 위안과 질서를 주기도 하지만, 사고의 게으름과 결합할 때 그것은 맹신으로 변하고, 탐구의 힘을 빼앗는다. 그래서 종교적 맹신과 인종차별은 뿌리를 같이한다. 둘 다 생각하기보다 단순한 틀에 안주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가짜 뉴스가 이렇게 쉽게 퍼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 경제, 과학 문제는 본래 복잡하다. 그러나 몇 줄짜리 음모론이나 흑백논리로 단순화하면 뇌의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특히 일부 종교 집단이 가짜 뉴스의 온상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상을 “신과 사탄의 싸움”으로 단순화하면 더 이상 사실을 검증할 필요가 없어진다. 타고난 지적 능력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다.
결국 브랜드에 의존하고, 편견에 빠지고, 종교적 단순화에 머물고, 가짜 뉴스와 정치 선동에 끌려다니는 모든 현상은 하나로 연결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고를 피곤해하고 단순화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본능을 넘어서는 사고의 힘 덕분이었다.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해 도피하기보다, 그 복잡함을 견디고 탐구하는 힘을 기를 때만이 우리는 맹신과 차별, 혐오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