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통업 시스템 도입 경험 1

글로벌 IT솔루션을 일본 유통업에 적용하려는 시도

by 쿨파스

나는 2003년에 일본 유통업계를 지원하는 글로벌 IT 솔루션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2000년대 초반은 기업 간 거래(B2B)에 IT를 활용하려는 붐이 일어나던 시기였는데, 흔히 ‘IT 버블’이라고 불렸다. 미국 월마트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Retail Link라는 협업 플랫폼을 개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월마트와 경쟁하는 글로벌 유통업체들이 공동 출자해 만든 B2B Exchange 회사였다.


출자자로는 미국의 Target, CVS Pharmacy, 영국의 Tesco, 네덜란드의 Ahold 등 세계적인 유통사들이 참여했다. 또 Tesco의 권유로 일본 최대 유통사였던 이온 그룹(당시 상호는 저스코)도 창립 멤버로 합류했다. 반면, 경쟁 관계였던 다이에(현재는 이온에 흡수)와 세븐일레븐을 보유한 이토 요카도는 이온과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우리 회사가 아닌 별도의 B2B 플랫폼 GNX에 합류했다. (나중에는 결국 두 조직이 합쳐져 하나로 통합되었다.)


이온 그룹은 창립 멤버이자 주주였고, 한국의 롯데 그룹도 이온의 초청으로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아시아·퍼시픽 지역 담당 지사가 도쿄에 설립되었고, 일본 국내 고객과 롯데 그룹, 홍콩·호주 고객까지 동시에 지원해야 했다. 자연히 한국어·영어·일본어를 모두 다룰 수 있는 컨설턴트가 필요했지만, 그런 인재는 흔치 않았다. 나는 유통업계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재일교포 사장이 운영하는 인재 파견 회사를 통해 우연히 기회를 얻어 입사할 수 있었다.


막상 들어가 보니, 도쿄 지사 직원 대부분도 유통업계 경험이 전무했고, 단순히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채용된 일본인들이 많았다. 사무실 규모는 7명 남짓으로, 아시아·퍼시픽 지역 총괄 제너럴 매니저(영업 겸임), 각 솔루션 담당 컨설턴트, 오피스 어드미니스트레이터가 전부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이온 그룹이 추진하던 마스터데이터 관리 솔루션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에 맞춰 채용되었다. 프로젝트 대부분은 이미 이온 그룹 담당자들이 직접 미국 본사와 연락하며 진행하고 있었지만, 일본인 제너럴 매니저는 “너무 기술적이고 복잡해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첫 출근 다음 날 곧바로 이온 그룹 치바현 마쿠하리 본사에 파견되었다. 본사 트레이닝도 받지 못했으니 솔루션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다만 운 좋게도 채용 시기가 미국 본사 컨설턴트 두 명의 일본 파견 시기와 겹쳐, 그들과 동행하며 어깨너머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배운 것은 상품 관리의 기초인 바코드 체계였다. 한국에서는 흔히 ‘88코드’라 불리고, 일본에서는 JAN코드라고 불린다. 13자리 바코드와 8자리 단축 바코드의 구조, 국가별 코드(한국은 880, 일본은 49 또는 45), 마지막 한 자리의 체크디짓 계산 방식 등 기본을 익혔다. 또 한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EAN(European Article Number) 체계와 북미의 UPC(Universal Product Code) 차이, 그리고 2005년에 두 체계를 통합해 GS1이라는 국제 표준 단체가 만들어지고 이를 ‘Sunrise 2005’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새로 접한 정보였다. 나에게는 완전히 낯선 세계였기에, 하나하나 메모하며 배워 나갔다.


내게 처음 주어진 업무는 이온 그룹의 PB(Private Brand) 상품인 Topvalu의 데이터 관리였다. 점포에서 바코드를 스캔해 계산할 때 필요한 정보, 물류센터에 발주할 때 필요한 데이터, 진열대 배치를 위한 속성 정보, 창고에서 재고 관리를 위해 필요한 항목까지, 상품 데이터를 총망라해야 했다. 협력 제조사들로부터는 여전히 플로피디스크에 담긴 엑셀 파일이 전달되었고, 골판지 상자 두 개 분량을 받아 각각 열어본 뒤 하나의 엑셀 파일로 취합하는 데만 꼬박 3일이 걸렸다.


그 후에는 데이터 중복을 점검하고, 이온 그룹 담당자가 만든 엑셀 매크로 기반 툴로 일차 정리를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데이터 관리 서버에 업로드하는 것이 절차였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철저히 미국 고객 전용으로 설계되어 있어 로컬라이징이 거의 없었다. 데이터 업로드 후 에러가 발생하면, 일반 유저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기술적 메시지가 PDF 파일로 첨부되어 이메일로 날아왔다. 당연히 일본 사용자에게는 지나치게 불친절하고 난해한 시스템이었다.


이 상태로는 일본 유저들이 일상 업무에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했다. 대규모 커스터마이징과 로컬라이징이 필요했지만, 전 세계 유저가 함께 쓰는 글로벌 SaaS 플랫폼은 함부로 손댈 수 없었고, 추가 비용 없이는 개선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데이터는 본사 서버에 업로드된 뒤 자동 변환 과정을 거쳐 이온 그룹의 기간 시스템(ERP)과 연계되었기에, 무엇보다도 협력 업체로부터 깨끗한 데이터를 받는 것이 관건이었다.


결국 프로젝트는 실패 직전이었다. 이때 나는 대학 시절 배운 프로그래밍 지식을 활용해, 이온 그룹 담당자가 만들어 놓은 매크로를 개조했다. 모든 오류를 엑셀 내부에서 버튼 하나로 점검할 수 있게 하고, 일본어 에러 메시지를 출력하도록 개선한 것이다. 또 이 과정을 통과하면 버튼 하나로 CSV를 자동 생성해, 곧바로 미국 서버에 업로드하면 에러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업로드 화면 자체가 영어로만 되어 있어 일본인 사용자들에게는 부담이 컸기 때문에, 업로드 작업은 이온 그룹의 B2B 담당자가 전담하는 프로세스를 설계했다. 그 결과,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직장에 안착했고, 본사 차원에서는 이미 실패로 기울던 프로젝트를 로컬에서 살려낸 공로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회사의 또 다른 주력 솔루션은 직접재·간접재 조달 시 온라인 입찰·리버스 옥션을 활용해 원가를 절감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 부문 담당 컨설턴트는 텃세가 심했고, 제너럴 매니저는 오히려 그에게 무시당하는 등 사무실 분위기는 막장이었다. 이온 그룹 역시 시스템 개선 요구를 묵살하고 본사 방침만 전달하는 경우가 많아 갈등이 심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는 일본 유저들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쓰고, 그들의 목소리를 본사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고객에게 직접 머리를 숙이며 불편을 줄이려 한 덕분에, 오히려 현장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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