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통업계에서 전국시대의 흔적을 보다

소규모 업체들이 군웅할거하는 일본 시장

by 쿨파스

처음 일본을 경험한 것은 JET 프로그램을 통해 니가타현의 중견 도시에서 국제교류원으로 파견되었을 때였다. 도착한 다음 날, 시청 과장님이 은행 계좌 개설을 도와주겠다며 직장에서 가까운 은행으로 안내해 주었는데, 그때 안내받은 은행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이시긴코(第四銀行)” —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사쿠라은행이나 스미토모은행처럼 익히 들어온 대형 은행이 아니라 생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은행은 일본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유서 깊은 금융기관이었고, 지금도 니가타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방은행이었다. 일본에는 이처럼 지역별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은행이 전국에 수십 곳 존재하며, 나가노현의 ‘82은행’처럼 설립 순서를 반영한 숫자 이름을 지금까지 사용하는 곳도 있다.


이 경험은 일본 사회의 경제 구조를 이해하는 첫걸음이었다. 일본에서는 금융뿐만 아니라 유통, 제조, 서비스 등 거의 모든 산업이 지역과 업종 단위로 세분화돼 있다. 이후 나는 일본 최대 유통기업 이온(AEON)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전국 각지의 유통업체를 상대로 영업을 하게 되었고, 이 구조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슈퍼마켓이라 하면 Loblaws나 Sobeys처럼 전국을 장악한 몇몇 대형 체인이 전부다. 드러그스토어도 Shoppers, 홈센터도 미국 자본의 Home Depot나 전국 규모의 Canadian Tire 정도로 손에 꼽을 만큼 단순하다. 그러나 일본은 전혀 달랐다.


슈퍼마켓, 드러그스토어, 홈센터, 자동차용품점, 유아용품 전문점, 심지어 낚시용품점과 골프용품점까지 업종별로 전국 규모의 체인들이 존재하고, 그 사이의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북관동 지역에서는 베이시아(Beisia)가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고, 드러그스토어 업계에서는 츠루하 드럭(ツルハドラッグ)이 업계의 ‘풍운아’로 급성장하며 각 지역의 소규모 체인을 흡수·합병해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었다. 나 역시 열심히 추진하던 시즈오카현 쿄린도(杏林堂薬局)의 상품관리 시스템 프로젝트가 츠루하에 M&A로 흡수되면서 모든 계획이 백지화되는 아픈 경험을 했다. 마치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일본의 유통 시장은 여러 세력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끊임없는 경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 기업은 거래은행, 상사(商社), 계열사와 복잡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었고, 이 연결망이 실제 비즈니스의 방향을 좌우했다. 내가 영업을 할 때도 특정 업체와 계약을 맺으면 그 회사의 계열사나 관련 업체는 일절 거래를 논의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텃세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일본 비즈니스의 오래된 방식이었다. ‘신뢰’와 ‘관계’를 중시하는 문화가 기업 간에도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거래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은 단순한 가격 경쟁이나 품질을 넘어 역사적 관계와 인맥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 최대 유통사인 이온 그룹 내에서도 원래부터 그룹에 속해 있던 계열사와 나중에 흡수 합병된 계열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과 미묘한 차별이 존재한다. “저 회사는 초창기 부터 이온 그룹의 피가 진하다” "저 회사는 이온에 매수된 지 얼마 안된 이온의 피가 묽은 회사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마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여 에도 막부를 세운 다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 편을 들었던 영주들은 토자마 다이묘 (外様大名)라고 하여 경계 대상 취급을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 이런 배경을 알지 못하면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성공시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캐나다 시장에서는 이런 복잡한 구도를 보기 어렵다. 몇몇 대기업이 전국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보다는 규모의 경제가 우선시된다. 한 유통업체와 거래를 한다고 해서 다른 곳과 거래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고, 계열사 네트워크에 따라 시장 접근이 차단되는 경우도 드물다. 효율성 면에서는 캐나다 모델이 단순하고 예측 가능하지만, 다양성이나 경쟁의 역동성 측면에서는 일본 시장이 훨씬 다층적이고 살아 있다.


내가 원래 일했던 전자입찰 솔루션 제공 회사는 일본의 이런 중소 유통업체들을 주요 타겟으로 삼았다. 이들 사이에는 ‘横並び意識’, 즉 서로 눈치를 보며 “남이 하면 우리도 한다”는 집단심리가 강했기 때문에, 한 곳에 솔루션을 판매하면 다른 비슷한 규모의 업체들도 “저 회사가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겠네”라며 영업이 연쇄적으로 성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내 경우는 달랐다. 나는 일본 최대 유통업체인 이온 그룹과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의 적”이라는 인식이 생겨 “우리 회사는 이온 그룹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말과 함께 거절당하는 일이 잦았다.


일본에서 영업을 하면서 나는 종종 전국시대의 전장을 떠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다케다 신겐처럼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동맹을 맺고 경쟁자를 견제하는 기업들의 모습은 단순히 ‘소매 경쟁’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였다. 기업 간 경쟁은 시장 점유율 싸움이자, 관계와 신뢰를 둘러싼 정치적 협상에 가까웠다.


그리고 일본 전국을 출장으로 다니며 직접 느낀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일본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구가 1억 2천만 명을 넘어서는 거대한 단일 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수많은 유통기업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공존하는 구조가 가능한 것이다. 인구 규모와 시장 규모가 충분히 크기 때문에, 소규모 업체라도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고 독자적인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일본을 전국적으로 다니며 나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깊이 있는 시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그때 문득 한국을 떠올렸다. 만약 남북이 통일되어 인구와 시장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커진다면,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가진 시장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한정된 내수 규모로는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산업 구조를, 통일 이후에는 비로소 구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마음 한켠에 남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일본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단순히 ‘유통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시장을 지배하는 구조와 문화, 그리고 규모의 차이였다. 캐나다의 유통 시장이 효율성과 집중의 논리로 움직인다면, 일본의 시장은 다층적이고 지역 기반의 역동성 속에서 관계와 경쟁이 얽혀 움직인다. 그리고 그 복잡한 구조 속에서 기업들은 전국시대의 다이묘처럼 오늘도 치열하게 싸우며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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