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시스템 도입과 운영을 겪으며
일본에서 비즈니스 솔루션, 특히 Product Information Management System (PIM) 을 일본 최대 유통업체에 제공했던 프로젝트는 단순한 시스템 구축을 넘어, 문화적 충돌과 조직적 비효율의 실체를 목격하는 시간이었다.
PIM은 상품 정보를 통합 관리하고 승인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는, 본질적으로 디지털 전환(DX) 을 위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일본의 업무 방식은 이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다. 시스템상 승인 절차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상품 정보의 최종 승인은 반드시 종이로 출력한 문서에 도장을 찍는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도장 문화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디지털 데이터보다 인쇄물에 더 높은 신뢰를 두는 조직심리의 반영이었다.
더 큰 문제는 시스템 구축 과정에서 나타났다. 일본 사용자들은 시스템의 업무 효율성이나 구조적 논리보다는 버튼의 위치, 표시 항목 수, 색상 등 감각적 요소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예컨대 버튼을 좌측이 아니라 중앙에 배치해 달라거나, 한 화면에 더 많은 항목을 보여 달라는 요구가 반복됐다. 그것은 '개선 요청'이 아니라 거의 개인의 미적 취향에 가까웠고, 글로벌 솔루션의 표준 UI 구조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런 커스터마이징은 나중에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할 때 버전 호환이 불가능한 기술 부채가 되었고, 유지보수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경험은 일본의 일상적 디지털 시스템과 대비될 때 더욱 기이하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고속버스 예매, 야후 옥션 결제·발송, 편의점 멀티 복합기에서의 문서 출력, 사진 인화 등은 세계적으로도 드물 만큼 정교하게 구성된 오프라인-온라인 연계 시스템이다.
그런데도 정작 일본어 입력은 화면 가득한 50음도 자판을 터치하며 가타카나를 하나씩 입력하는 원시적 방식이 여전히 주류다. 디지털의 최첨단과 아날로그의 원시성이 한 화면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라, 그것이 바로 일본이었다.
문서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기업에서는 발표 자료조차도 발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자료만 보면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파워포인트에는 한 화면에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밀어넣는 것이 일반적이고, 요약이나 구성이 아닌 정보의 ‘총량’이 문서의 질을 결정짓는다.
워드보다 파워포인트를 보고서처럼 사용하고, 설계도조차 엑셀로 방안지처럼 만든 뒤 오브젝트를 덕지덕지 배치하며, 파워포인트의 텍스트 박스도 줄마다 따로 만들고 눈대중으로 정렬하는 방식이 여전히 통용된다. 효율성과 논리보다는 형식적 정돈과 감각적 배열이 우선시되는 문화다.
한때 “일본인은 꼼꼼하고 성실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현장에서 함께 일하다 보면 그것이 얼마나 과장된 인식인지 드러난다. 일본 내 거리 간판이나 식당 메뉴, 상품 패키지에는 영어 단어의 철자 오류(Engrish) 가 여전히 넘쳐난다. 영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정확히 쓰려는 시도조차 없이 감각적으로 처리하고 넘겨버리는 일 처리 방식 때문이다.
내가 함께 일했던 일본인 직원 중에도 발표 자료의 숫자 오류, 의미 불일치, 논리적 결함 같은 ‘凡ミス’는 빈번했으며, 그런 오류는 내부적으로 별다른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반면 폰트 크기, 색상 배열, 줄 간격 같은 형식적 요소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잔소리가 이어졌다.
이는 꼼꼼함이 아니라, 본질보다 책임 회피와 감각적 정돈을 우선하는 업무문화에 가까웠다.
내가 일본 법인장으로 일할 당시, 또 다른 비합리성을 자주 겪었다. 우리 고객사 대부분은 일본 기업이었지만, 계약은 독일 본사와 체결되었기에 매달 이용료 청구서는 독일 본사에서 영어로 작성되어 일본 고객사에 직접 발송되었다. 그런데 고객사의 IT부서가 청구서에 적힌 영어 부서명을 이해하지 못해 ‘청구서를 못 받았다’는 연락이 오거나, 내부 유통이 되지 않아 지불이 지연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결국 나는 청구서를 우리 일본 지사로 먼저 받은 뒤, 고객사 주소를 일본어로 다시 쓰고 우편 재송해야만 했다.
어느 날은 청구서가 흑백으로 프린트되어 도착했는데, 고객사 담당자가 “이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다. 컬러로 다시 보내 달라”고 요청해왔다. 결국 나는 일본 국내에서 컬러 프린트를 한 뒤 직접 다시 발송하는 일을 해야 했다. 청구서 내용은 완전히 동일했고, 디지털 서명이 된 PDF 문서였지만, 문서가 컬러냐 흑백이냐에 따라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관행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시스템이나 계약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형식에 대한 집착과 비합리적 관성의 결과였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은 디지털 시스템을 수입하고 최신 기능을 장착할 수 있는 기술력은 있지만,
그 시스템이 바꾸어야 할 사고방식과 업무 문화는 바꿀 의지가 없다.
업무를 표준화된 구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자기들 방식에 맞게 고쳐 쓰고, 형식적 절차를 본질보다 앞세우며, 오류보다 체면과 감각적 질서를 우선시한다.
디지털은 외피일 뿐이고, 그 안의 핵심은 여전히 종이와 도장, 눈대중, 책임 회피, 그리고 변화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일본에서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며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디지털화된 아날로그 사회’의 실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