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를 영원한 과제로 만들다

일본 영토 분쟁의 정치화

by 쿨파스

일본은 주변 국가들과 여러 영토 분쟁을 동시에 안고 있다. 한국과는 독도, 중국과는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러시아와는 북방영토를 두고 갈등이 계속된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이 억울한 영토를 되찾으려 한다”는 구도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일본 스스로 분쟁을 해결할 의지가 없고, 오히려 갈등의 영속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 더욱 핵심적인 문제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 북방영토 문제는 단순한 국익 차원을 넘어 실향민과 조상의 묘가 관련된 인권 문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독도나 센카쿠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쿠나시리, 에토로프, 시코탄, 하보마이 등 북방 4개 섬은 과거 일본인이 실제로 거주하던 섬이었으며, 전쟁 후 소련군의 점령과 함께 주민들이 강제로 추방되었다. 이들에게 북방영토 문제는 단지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현실적 상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인도적 현실보다 “되찾아야 할 고토(故土)”라는 명분 아래 포장하며, 해결 가능한 타협조차 거부해왔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은 이미 “쿠릴 열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 상태였고, 에토로프 및 쿠나시리는 명백히 쿠릴 열대에 속한다는 국제법적 해석이 일반적이다. 반면 시코탄과 하보마이는 쿠릴 해구와 단절된 지질적 특성으로 인해 홋카이도 네무로 반도와 밀접한 연결성을 가진 섬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 소련(러시아)도 이를 인정하며 두 섬을 반환하는 2도 반환론을 제시한 적이 있다. 즉 현실적인 2도 반환의 가능성은 존재했으나, 일본은 “4도 일괄 반환”을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다. 명분상 완전한 승리 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가 결과적으로 실향민조차 영원한 “되찾아야 할 피해자”로 묶어두는 결과를 낳았다.


독도 문제에서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당 조약은 “제주도, 울릉도, 거문도를 포함하여 조선에 속한 모든 도서”를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제주·울릉 등을 예시로 든 개방형 열거 방식이다. 만약 조약에서 언급되지 않은 섬은 포기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를 따른다면, 거제도, 가파도, 마라도, 흑산도 등도 조약에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일본 영토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는 조약의 구조를 ‘예시’가 아니라 ‘완전 목록’으로 왜곡한 억지에 불과하며, 사실상 “빠져 있으니 우리 땅”이라는 무리한 논리로 분쟁을 인위적으로 유지하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일본 정치권이 영토 문제를 해결 가능한 현실적 외교 과제가 아니라, “계속 외칠 수 있는 국가주의적 슬로건”으로 소비하며 내부 결집을 위한 정치 자산으로 삼아왔음을 보여준다. 영토가 되찾아지면 예산은 종료되고, 실향민 단체들은 사라지며, ‘계속 노력하겠다’라는 반복 가능한 정치 언어는 사라진다. 그러나 문제를 유지하면 선거철마다 “나라를 되찾자”는 구호만으로도 정치적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 정치에 있어서 영토 문제는 해결된 상태보다 해결되지 않은 상태가 더 정치적으로 유리한 구조가 된다.


이러한 태도 뒤에는 일본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타협 회피성”이 있다. 일본은 외교나 정치 갈등 상황에서 현실적 양보를 통한 절충보다는 ‘명분을 절대화하고 최종 목표를 조금도 낮추지 않는 방식’을 선호해 왔다. 이 과정에서 타협은 국가의 체면을 깎는 패배로 간주되고, 현실적인 협상 딜은 “국체를 훼손하는 행위”처럼 여겨진다. 그 결과,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마저 “목표는 높지만 도달은 불가능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는 북방 4도 일괄 반환 고집과 독도에 대한 무조건적 영유권 주장이 모두 같은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사실 이러한 태도는 전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전쟁 말기 일본이 항복 조건을 논의하던 시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1945년 일본은 전쟁에서 이미 패색이 짙었음에도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며 “조건부 항복”을 고집했다. 그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천황제를 유지하여 ‘국체(国体)’를 보존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조선, 대만, 남사할린(가라후토) 및 쿠릴 열도 등 이미 전쟁 전부터 보유한 식민지 및 영토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즉 일본은 “패배를 인정하되 영토는 내놓지 않는다”는 비현실적 꿈을 끝까지 고수했고, 그 결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지는 등 막대한 민간인 희생을 초래하며 전쟁을 불필요하게 장기화시켰다. 이처럼 일본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명분 있는 영토”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나는 이 지점을 보며 하나의 가정을 떠올리게 된다. 만약 일본이 패전하지 않고 조선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유지했다면, 과연 영국처럼 현실을 인정하고 협상을 통해 독립을 허용했을까? 영국은 인도나 말레이, 싱가포르 등 식민지에 대해 자치권을 점진적으로 인정하고 국제사회의 조정도 어느 정도 수용하며 제국 해체의 과정을 조절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 말기에도 영토를 포기할 수 없는 ‘국체의 불가양 요소’로 규정했다. 이러한 경향이 현재 영토 분쟁 태도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이 자발적인 타협을 통해 식민지 독립을 인정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조선의 완전 일본화”라는 명분 아래 타협 없는 동화를 지속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일본은 해결할 수 있었던 영토 문제를 끝없이 연장 가능한 정치적 자원으로 만들었고, 과거 제국주의 논리에서 비롯된 ‘양보 없는 명분 고수’의 정신을 전후 체제에서도 고스란히 유지해왔다. 영토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토를 명분으로 삼아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은 고통받는 실향민과 주변국 국민 모두를 끝없는 소모전에 끌어들이는 비루한 방식일 뿐이다. 해결 가능한 분쟁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신성한 사명”으로 포장하고, 국민에게 ‘언젠가는 되찾을 것’이라는 달콤한 환상을 제공하며 문제를 영원히 남겨두는 정치 구조는, 결국 영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토에 기생하는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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