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함을 감수할 줄 아는 용기
노베 히로시의 『바보의 벽』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 말은 단순한 지적 한탄이 아니라, 인간 인식의 구조를 드러낸 진실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자신이 믿고 싶은 것, 자신에게 유리한 것에만 눈을 뜨고 불리한 것은 외면하려는 성향을 가진다. 그러나 그 본능을 자각하고, 불편함을 견디며,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원칙에 맞는 것을 선택하려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한 단계 높은 존재가 된다. 이성은 그렇게 본능을 제어하는 힘에서 시작된다.
오래전부터 리버럴 사상이 옳다고 믿어왔다. 평등과 인권, 공정한 사회, 약자를 배려하는 가치 — 이런 것들이야말로 인간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버럴의 깃발 아래에서도 늘 납득하기 어려운 논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낙태 문제였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권리로 확장되어 태아의 생명권이 완전히 무시될 때, 나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물론 원치 않는 임신이나 불행한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잉태된 생명이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워지는 일에는 깊은 윤리적 고민이 따라야 하지 않을까. 그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여성 억압적”이라고 몰아붙이는 풍조는, 오히려 사고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일처럼 보였다. 이건 단순히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스스로의 편향을 자각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어떤 윤리적 판단이든, 공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판단을 내린 사람이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논리만 고집하는 사람은 결코 공정하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논리는 언제나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원칙을 따르려는 사람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그는 이익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공정함이란 타인을 이기기 위한 논리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연습이다. 우리는 흔히 “공평하게 대하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공평이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어린아이와 노인 중 한 사람밖에 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남자냐 여자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나와 같은 집단이냐 아닌가, 그런 선택의 순간마다 인간의 본심은 드러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과 닮은 쪽을 선택한다. 그건 본능이지만, 도덕은 그 본능을 의식적으로 제어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신뢰는 이익이 아닌 절제의 흔적에서 만들어진다. ‘공정한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완벽히 옳아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조차 엄격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교육이란 원래 그런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것이어야 했다.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을 절제하고,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며, 편향을 자각하는 힘을 기르는 일, 그게 진정한 교육의 목적이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진실로 인정하는 존재”로 머문다면, 우리는 아무리 똑똑해져도 결국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짐승에 머물 뿐이다. 공정함은 타고나는 성향이 아니다. 그건 훈련되고, 다듬어지고, 스스로에게 불리한 결정을 반복해본 사람만이 얻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