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언어와 듣는 언어

한글 중심주의와 한국의 문자적 사고

by 쿨파스

언어는 본래 소리다. 사람은 눈으로 언어를 배우지 않는다.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머릿속에서 의미를 구성한다. 문자는 그 소리를 시각적으로 남기기 위해 고안된 도구일 뿐이다. 문자가 발명된 이유는 눈으로 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음성은 공기 중에 흩어지고 사라지지만, 문자는 남는다. 녹음기가 없던 시대에 인간이 기억과 기록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문자였다. 문자의 본질은 시각적 소통이 아니라, 사라지는 소리를 붙잡는 기술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이 단순한 사실이 자주 잊힌다. 우리는 언어를 글자로 배우고, 글자를 곧 언어로 믿는다. 그래서 한글을 곧 한국어라고 생각하고, 세종 이전에는 언어도 없었다고 착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언어적 혼란의 근원이다.


한국에서 “한글은 우리의 자랑”이라는 말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자부심 속에는 묘한 오해가 숨어 있다. 한글은 문자 체계이지, 언어 그 자체가 아니다. 한국어는 한글로 쓰이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분명히 한국어를 말했지만,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빌려 썼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중국어를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을 때 한국어도 함께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문자를 언어와 동일시하는, 시각 중심의 언어관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결국 “세종 이전에는 조선인이 중국어를 썼다”는 황당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언어는 음성이며, 문자는 그 음성을 붙잡기 위한 부호라는 기본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자 중심 사고의 결과는 한국 사회 전반에 깊이 퍼져 있다. 우리는 언어를 ‘보는 것’으로 배운다. 어릴 때부터 듣기보다 읽기, 말하기보다 쓰기를 먼저 익히며, 외국어를 배워도 발음보다 철자와 문법을 외운다. 언어를 귀로 체험하기보다 눈으로 암기하는 문화 속에서 ‘언어=문자’라는 감각이 체화된다. 그래서 로마자 표기 같은 문제에서도 한국인은 로마자를 ‘한국어의 기록 수단’이 아니라 ‘외국인을 위한 영어 장식’ 정도로 생각한다. 정부가 정한 표기법이 있음에도 누구도 지키지 않고, 외국인이 발음하기 쉬운 표기가 오히려 “세련돼 보인다”고 믿는다.


이런 현상을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국어 시간에 로마자 표기를 배운다. 아이들은 로마자가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의 표기 수단임을 어릴 때부터 안다. 그래서 영어식 발음과 달라도 표기는 바뀌지 않는다. 로마자는 일본어를 세계 문자로 옮긴 기호이기 때문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한어병음(Pinyin)은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의 표기 체계다. 영어 발음과 다르더라도 중국인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일관성이 곧 언어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로마자를 영어의 하위 개념으로 인식한다. 로마자는 한국어를 기록하는 체계가 아니라, 외국인이 읽기 쉬운 철자법쯤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같은 이름과 단어가 끝없이 다른 표기로 흩어진다. “이씨”는 Lee, Yi, Rhee, I로 나뉘고 심지어 같은 가족이 아버지는 Lee, 아들은 Yi로 표기되어 외국에서 가족관계 증명이 어려운 사례도 있다. 언어 주체가 스스로의 표기 원칙을 세우지 못한 결과, 표기 일관성은 사라지고 언어 신뢰도는 함께 무너진다.


한글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과학적 문자 체계다. 하지만 바로 그 ‘완벽함’이 오히려 언어 감각을 마비시켰다. 많은 한국인은 한글을 한국어의 완전한 대체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정교한 문자라도 언어의 본질인 소리의 흐름과 의미의 미묘한 변화를 완벽히 담을 수는 없다. 한글은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뛰어난 기호이지만, 언어의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문자가 아무리 완벽해도 소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일본인들이 흔히 범하는 오해가 있다. 일부 일본 지식인들은 한국의 ‘한글 전용’을 비판하며, 한자를 버린 한국어의 표현력 저하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착각이다. 한자는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이며, 구조적으로 다른 언어를 온전히 기록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한자의 표의성은 중국어의 단음절 구조에는 최적화되어 있지만, 조어와 굴절, 음운 변화를 가진 언어에는 맞지 않는다. 한국이나 일본, 베트남은 오랫동안 한자를 빌려 자기 언어를 적어보려 했지만, 결국 근본적 한계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수백 년 동안 한자를 억지로 꿰맞춰 쓴 것은, 그것이 당시 문명권의 공통 문자였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 문명권에 로마자와 같은 유연한 표음 문자 체계가 일찍부터 존재했다면, 한글도, 가나도 굳이 발명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독자적 문자를 만든 이유는, 한자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부적합함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한글의 등장은 음성 언어 중심으로 회귀한 혁명에 가깝다. 세종대왕은 한국어를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한국어의 소리를 가장 정확하게 시각화할 수 있는 부호 체계를 설계했다. 그의 통찰은 언어의 본질을 시각화한 것이 아니라, 언어의 본질이 ‘소리’임을 이해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는 역설적으로 그 세종의 철학을 잊고 있다. 한글의 과학성을 자랑하지만, 언어를 다시 문자 속에 가둬버렸다.


언어는 귀로 존재한다. 문자는 그 소리를 붙잡기 위한 인간의 기억 장치일 뿐이다. 문자가 없다면 말은 사라지지만, 말이 없다면 문자는 아무 의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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