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무감각이 악으로 변하는 순간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한 장면은 인간의 폭력성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황장수 병장은 후임 조석봉 일병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제대한 뒤 탈영한 조석봉이 황장수의 집에 찾아가 납치한 후 “저한테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묻자, 황장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단순한 드라마 대본의 한 줄이 아니다. 인간이 악을 저지를 때 가장 자주 내뱉는 변명의 핵심이자, 사회가 무너질 때마다 반복되어 온 한 문장이다. 모든 폭력과 혐오, 권력의 오용은 바로 이 말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악의 본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허용된 범위 안에서’ 행동하려 한다. 문제는 그 허용의 경계가 점점 느슨해질 때다. 처음에는 농담이었다가, 그다음엔 욕설이 되고, 누군가를 밀치며 결국 주먹을 휘두른다. 그 과정 내내 사람들은 스스로를 악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다들 하니까”, “누가 뭐라 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1961년 예일대에서 진행된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이 심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전기 충격 버튼을 누르는 참가자 대부분은 피해자의 비명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 말했다. 윤리적 판단을 외부 권위에 위임하는 순간, 평범한 사람도 잔혹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짐바르도의 감옥 실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수 역할이니까”, “실험이니까.” 그 한마디가 폭력의 면허장이 되었다. 이 심리는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일본의 ‘재특회(在日特権を許さない会)’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그랬다. 처음엔 몇몇 온라인 게시판에서의 혐오로 시작했지만, 경찰이나 중앙정부, 지자체가 제지하지 않자 그들은 공공시설을 빌려서 집회를 열었고 조직적으로 조선학교 앞에 가서 앞에서 “좋은 조선인도 나쁜 조선인도 다 죽어라”, “기생충”이라 외쳤다. 행정은 “법적으로 막을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그래도 된다”는 허락으로 변했다. 이후 혐오는 거리의 언어가 되었고, 사회는 서서히 병들었다. 지금 한국의 극우 세력이 중국인을 향해 내뱉는 말도 똑같다. 처음엔 온라인상이지만 이제는 현실 세계로 나왔고 물리적 폭력까지 일어난다. 법과 사회가 단호히 제재하지 않는 한, 그들은 “이게 애국이다”는 착각 속에서 언제든 폭력을 ‘정의’로 포장할 것이다.
유대인 학살도, 르완다의 대학살도, 처음부터 계획된 대학살이 아니었다. “그들도 인간이 아니다”, “그래도 된다.” 그 작은 문장이 천만 명을 죽였다. 악은 거창한 명분으로 오지 않는다. 그저, ‘허용된 무감각’의 축적 속에서 자란다. 윤석열 체포영장 발부 후 법원 습격 사건 역시 같은 궤적을 밟았다. 처음엔 인터넷상의 혐오 그다음엔 거리의 분노로, 마침내 폭력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서야 말했다. “이게 범죄인 줄 몰랐다.” 그것이 바로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의 결말이다.
혐오를 말로 막을 수는 없다. 법이 작동하고 사회가 명확한 금선을 긋는 것만이 해독이다. 자유와 관용은 문명의 핵심이지만, 그 자유를 이용해 타인을 공격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않으려면,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되기 전에, 문제의 싹이 작을 때부터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