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꿩과 한국 꿩은 같은가 다른가.
나는 한때 한국어로 번역된 일본의 전래동화와 일본어 학습 자료를 통해, 한국어의 ‘꿩’은 일본어의 ‘키지(雉)’, 한국어의 ‘꾀꼬리’는 일본어의 ‘우구이스(鶯)’라고 자연스럽게 외워 왔다.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단어란 보통 그렇게 1대1로 대응된다고 믿었고, 당시에는 아무런 의문도 들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실제 일본의 꿩과 꾀꼬리 사진을 접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한국의 꿩·꾀꼬리와 나란히 비교해 보니 그 차이는 분명했다. 한국에서 말하는 꿩과 일본의 키지는 같은 이름으로 번역되어 왔을 뿐, 생김새부터가 꽤 달랐다. 일본의 키지는 몸 전체가 푸른빛을 띠는 반면, 한국의 꿩은 갈색 계열의 몸색을 지니고 있다. 꾀꼬리와 우구이스에 이르면 차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한국의 꾀꼬리는 노란 몸색의 새인 반면, 일본의 우구이스는 옅은 녹색이나 올리브색에 가까운 전혀 다른 새다. 참고로 꿩은 영어로 pheasant라고 하며, 사냥용 새로 북미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과거 중국 등지에서 들여온 것으로 한국의 꿩과 같은 계통에 속한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편의상 비슷한 이름으로 번역되어 왔을 뿐, 두 나라에 반드시 완전히 같은 종의 동식물이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지만 바다를 사이에 둔 나라다. 이 짧은 거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물의 분포와 진화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긴다. 그럼에도 번역의 과정에서는 종종 ‘비슷해 보이는 생물’에 이미 익숙한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해서 이름은 같아지지만, 실체는 다른 대상들이 만들어진다.
비슷한 경험은 음식에서도 있었다. 일본 마트에서 ‘이시모치’라는 생선을 보고 사전을 찾아보니 ‘조기’라고 되어 있어 기대를 품고 샀지만, 실제로 먹어 보니 기름기 없는 담백한 맛에 적잖이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인터넷 덕분에 세부적인 종 구분이 가능하지만, 당시에는 일한사전이나 한일사전 하나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의 유명한 전래동화 『모모타로』에는 주인공이 동물들에게 ‘기비당고’를 나누어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를 ‘수수경단’으로 옮겼다. 그 탓에 나는 오랫동안 기비가 곧 수수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기비는 ‘기장’이고, 수수는 일본어로 もろこし가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장경단’보다는 ‘수수경단’이 한국인의 감각에는 더 이해하기 쉬웠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어가 가리키는 범위가 서로 달라 고민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일본어의 ‘야키니쿠’가 그렇다. 한국에서는 돼지갈비, 삼겹살, 소갈비처럼 고기가 세분화되어 있고, 각각의 전문점에 가서 먹는다. 반면 일본에서 ‘야키니쿠’ 집에 가면 소고기, 돼지고기, 삼겹살까지 한 자리에서 모두 먹을 수 있다. 예전에는 ‘야키니쿠’를 ‘불고기’라고 옮겨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의 불고기는 서울불고기, 언양불고기처럼 특정한 요리 이름이 되었다. 그렇다고 ‘고기 구이’라고 하면 서양식 바비큐나 중동의 케밥까지 포괄하는 느낌이 된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어르신들이 케이크까지 통틀어 ‘빵’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빵과 케이크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한국의 파리바게트에는 빵과 케이크가 함께 있지만, 일본에서는 케이크집에서 빵을 팔지 않고, 빵집에서는 케이크를 팔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언어의 어긋남은 일본인 아내와의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아내가 어떤 냄새를 맡고 “쿠사이(くさい)!”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한국어 화자의 습관 때문에 자연스럽게 ‘구리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화장실 냄새나 상한 음식처럼 생리적으로 불쾌한 악취를 먼저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 문제의 냄새는 휘발유나 페인트 같은 화학적인 냄새일 때가 많았다. 일본어의 ‘쿠사이’는 배설물이나 부패한 냄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석유 냄새, 약품 냄새, 연기나 타는 냄새처럼 원인과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강하고 불쾌한 냄새’ 전반을 가리킨다. 반면 한국어의 ‘구리다’는 오물이나 부패, 위생과 직접 연결된 냄새를 강하게 떠올리게 한다. 일본어는 한국어의 ‘구리다’, ‘퀴퀴하다’ 등을 포괄해 ‘쿠사이’ 하나로 묶는 셈이다.
언어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복사하지 않는다. 각 언어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필요로 했던 방식대로 세계를 자르고, 묶고, 이름 붙인다. 번역은 그 서로 다른 절단면을 억지로 맞추는 작업이다. 지금도 내가 매일 통역을 하며 느끼는 점이지만, 분명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무엇이라고 옮겨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단어는 끝이 없다. 그래서 나는 누가 예를 들어 "다녀왔습니다를 영어로 뭐냐 "덕담"을 일본말로 뭐라고 하냐는 식으로 물어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영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일본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물어봐야 그 상황에 맞는 표현을 알려 줄 수 있다.
그래서 통번역은 언제나 위험하다. 단어는 맞지만 대상이 다르고, 설명은 맞지만 이미지가 어긋난다. 꿩과 키지의 어긋남은 내가 외국어를 배우며 겪은 작은 에피소드였지만, 동시에 언어가 어떻게 현실을 다르게 구성하는지를 처음으로 체감하게 해 준 계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