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니즘, 사상, 그리고 한·일의 엇갈림
한국과 일본은 모두 전체주의적 요소를 경험해 온 사회다. 국가와 조직, 공동체가 개인보다 우선되던 시기는 두 나라 모두에 존재했다. 그러나 같은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단어로 이 두 사회를 설명하기에는,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오늘날 한·일 간의 과거사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한국 사회의 전체주의는 개인에게 분명한 희생을 요구해 왔다. 산업화와 냉전, 국가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개인의 삶이 소모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고통과 희생이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의 대상으로 다시 호출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민주화 운동, 국가 폭력, 산업재해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그것이 옳았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재서술되었다. 억압은 있었지만,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반면 일본의 전체주의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일본 사회에서 개인은 희생의 주체라기보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구성 요소에 가깝게 취급되어 왔다. 희생은 비극이라기보다 불가피한 결과로 처리되고, 책임은 특정 개인이나 제도가 아닌 ‘상황’이나 ‘분위기’ 속으로 흩어진다. 이 구조에서는 개인의 고통이 윤리적 질문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문제를 명확히 규정하는 순간, 질서 그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사과’를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사회에서 사과는 대체로 관계를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절차다. 책임을 인정하면 그 문제는 일단락되고, 이후에는 새로운 관계 설정이 가능해진다는 인식이 비교적 널리 공유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사과 요구는 일본을 괴롭히기 위한 언어라기보다, 오히려 뒤끝 없이 앞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표시에 가깝다.
이 점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일본 문화 소비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인들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일본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즐긴다. 애니메이션, 음악, 음식, 생활문화는 이미 일상 속에 녹아 있으며, 그 소비는 맹목적 동경이 아니라 이해와 비판을 포함한 성숙한 형태에 가깝다. 그럼에도 과거사에 대한 사과 요구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일본을 계속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리되지 않은 문제를 정리하고 나서야 아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이 요구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일본에서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아니라, 영구적인 낙인의 시작으로 인식된다. 한 번 책임을 인정하면 그 사람이나 조직은 끝없이 그 문제의 당사자로 호출될 수 있고, 명예와 사회적 위치는 회복되기 어렵다. 이런 문화 속에서 사과 요구는 화해의 제안이 아니라 “인정하면 평생 그 책임을 물고 늘어지겠다”는 위협처럼 들린다. 그래서 일본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애매한 표현과 시간 끌기, 책임의 분산을 통해 사안을 흐리게 만드는 쪽을 선택해 왔다.
북한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한 사례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북한 역시 같은 민족 사회의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만큼, 문제를 인정하고 정리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책임을 인정한 순간, 일본은 화해와 국교 정상화의 수순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잘 걸렸다”는 태도로, 이미 인정된 피해자 외에도 방대한 실종자 문제를 모두 해결하라는 요구를 덧붙였다.
당시 일부 일본의 진보적 언론은 이를 두고 “일본이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피해자 지위를 손에 넣었다”고 비꼬기도 했다. 북한이 납치 사실을 부정할 때에는 일본 사회도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북한이라는 국가의 특이한 체제 역시 외면했다. 그러나 책임을 인정한 순간, 마치 처음 알게 된 사실인 양 호들갑스럽게 보도하는 모습은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한국과 일본의 방식 중 어느 쪽이 글로벌 기준에 더 보편적인가라는 문제다. 국제사회에서 과거사와 인권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비교적 명확하다.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를 중심에 두며, 사과와 재발 방지를 통해 관계를 정상화하는 절차가 그것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한국의 방식은 갈등을 제도와 언어로 해결하려는 보편적 접근에 가깝다. 반면 일본의 방식은 내부 질서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지역적, 로컬한 최적화에 머문다.
이 차이의 근원에는 더 깊은 문제가 있다. 휴머니즘의 유무는 결국 사상의 유무와 연결된다.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인식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오랜 사유와 논쟁, 그리고 자기반성의 축적 속에서 형성된다. 휴머니즘은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하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결과다.
한국 사회는 전체주의적 압박 속에서도 끊임없이 “그것이 옳았는가”를 묻는 질문을 반복해 왔다. 유교적 도덕 담론, 근대 이후의 민족주의, 민주화 과정에서의 인권 담론이 충돌하며 축적된 결과, 권력과 질서는 사유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은 언젠가 반드시 질문으로 돌아온다.
반면 일본 사회에서는 질서 자체가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유지되어야 하는가가 우선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고통은 사상적 질문으로 승격되지 못한다. 이는 일본 사회에 사유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질서를 흔들 수 있는 사유가 구조적으로 억제되어 왔다는 뜻에 가깝다. 그 결과 휴머니즘은 결여된 것이 아니라, 휴머니즘으로 이어질 사유의 경로가 차단된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시끄럽고 피곤하다.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시 꺼내고, 과거를 반복해서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한국 사회는 글로벌 규범과 접속할 수 있다.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사유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휴머니즘은 감정이 아니라 사상의 결과이며, 책임을 끝까지 사유하는 사회만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