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가능한 재해와 통제 불가능한 재해의 차이
일본 사회를 오래 경험하다 보면, 한국 사회와의 근본적인 차이로서 ‘무엇이 옳은가’를 따지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그것보다 무엇이 이익인가, 무엇이 손해인가가 항상 먼저이고, 옳고 그름은 결국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옳고 그름 자체는 예의상 따지는 일종의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속으로는 다들 욕망에 따라 살고 있을 뿐인데,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 무엇 하느냐는 냉소가 깔려 있는 듯하다.
이러한 태도는 흔히 ‘실용주의’나 ‘리얼리즘’으로 설명되지만, 그 성격은 철학적 성찰의 결과라기보다는 결국 세상은 욕망과 힘에 의해 지배되는데, 옳고 그른 것을 따져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체념에 더 가깝다. 나는 일본 사회의 이러한 사고 경향을 자연재해, 그중에서도 재해의 통제 가능성 차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자연재해라고 해도 그 성격은 동일하지 않다. 홍수나 가뭄, 기근은 어느 정도 인간의 개입이 가능한 재해다. 치산치수나 관개, 제도 정비를 통해 피해를 줄이거나 반복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재해는 필연적으로 “왜 발생했는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낳는다. 즉 재해가 곧 정치와 윤리의 언어로 번역된다.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임금이 덕이 없어서 그렇다거나 정치가 문란해서 그렇다는 해석이 나오는 태도는 조선시대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
중국 역사에서도 치수는 지도자의 핵심 책임이었다. 정치가 무너지면 국가는 분열되었고, 전쟁과 그로 인한 대규모 살육의 시대가 반복되었다. 유교·법가·묵가·도가라는 서로 다른 사상은 모두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재해를 줄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공유한다. 통치자의 책임, 제도의 정당성, 명분과 도리라는 개념은 모두 인간이 만든 재해를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 치수를 실패하면 천명을 잃는다는 사고 역시 자연과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된 결과다.
반면 일본의 자연환경은 전혀 다른 사유를 낳았다. 일본에서 가장 치명적인 재해는 지진, 화산 폭발, 해일과 같이 인간의 노력으로 예방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재해다. 언제 발생할지 알 수 없고, 원인을 규명하더라도 다음을 막을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 “왜?”를 묻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가 책임자인가”를 따지는 일은 공동체를 분열시킬 위험만 키운다.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적응이며, 정의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였다.
이 차이는 일본 사회가 인간의 살육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일본 역시 전국시대를 비롯해 격렬한 내전을 겪었지만, 그것을 인간이 통제해야 할 재해로 사유하지 않았다. 전쟁은 명분의 실패나 윤리적 붕괴라기보다는, 지진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전쟁을 분석하고 재발 방지의 원리를 세우기보다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사회를 ‘정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도쿠가와 막부의 장기 안정은 정의로운 통치의 결과라기보다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선택에 가까웠다.
한국보다 훨씬 늦게,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들어서야 일본에서도 유교가 국가 질서의 이념으로 채택되었지만, 일본의 유교는 인·효·덕과 같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보다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충’만을 강하게 강조했다. 이는 윤리적 성숙의 결과라기보다는, 사회를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려는 목적에 가까웠다.
이러한 환경에서 일본 사회는 윤리보다는 분위기를, 정의보다는 질서 유지와 관행을 중심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옳은 말이라도 공기를 깨면 문제가 되고, 잘못된 일이라도 질서를 유지하면 용인된다.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보다 책임을 분산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편이 더 안전한 선택이 된다. 이는 비겁함이라기보다는, 통제 불가능한 세계에서 학습된 생존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외교를 담당했던 대마도주 소(宗)씨 가문의 행태다. 대마도주는 임진왜란 직후 조선과 에도 막부가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 요구와 조선 측 요구가 근본적으로 맞지 않아 국교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양국의 국서를 반복적으로 위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벌을 위해 조선의 복종과 협력을 요구했을 때도, 그 국서를 “사신을 보내 달라”는 내용으로 바꾸어 전달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왕릉을 훼손한 범인을 잡아 보내라는 조선 측 요구를 막부에 전달하지 않고, 조선과 아무 관련도 없고 실제로 조선에 간 적도 없는 대마도의 죄인을 대신 넘겼다.
16세기 말, 쓰시마번의 가신이었던 야나가와 시게오키가 쓰시마번에서 독립을 시도하며, 대마도주의 국서 위조 사실을 도쿠가와 막부에 폭로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야나가와 잇켄’이다. 야나가와는 이를 통해 소씨가 독점하던 조선과의 무역 권한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성에 당사자들을 불러 주요 다이묘와 하타모토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심문한 끝에, 대마도주 소씨를 무죄로 하고 부정을 고발한 야나가와를 유배 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막부의 감시가 강화되기는 했지만, 부정을 폭로한 행위보다 질서를 흔들고 상하 관계를 뒤집으려 한 점을 더 중하게 본 판단은 전형적인 일본식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조선에는 신문고를 비롯해 백성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했다. 반면 일본에서 질서를 건너뛰어 막부 쇼군에게 직접 직소를 올리는 행위는 사실상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는 조선의 왕권이 막부 쇼군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훨씬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차이다.
중국이 인간이 만든 재해를 관리하는 사상을 발전시켰고, 한국이 그 영향을 받아 도덕과 책임의 언어를 사회 비판의 도구로 유지해 온 반면, 일본은 질서 유지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 왔다. 그 결과 일본 사회에는 정치 철학이 빈약하고, 옳고 그름을 둘러싼 공개적 논쟁이 자리 잡기 어려웠다. 대신 “내 자리는 어디인가”, “튀지 않는 선택은 무엇인가”가 사고의 중심이 되었다.
정리하자면, 일본 사회의 옳고 그름 회피는 성숙한 상대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재해조차 통제 불가능한 자연재해의 범주로 받아들여 온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서 판단은 위험했고, 침묵은 합리적이었다. 이 구조를 이해할 때 비로소 일본 사회의 냉소, 책임 회피, 손익 중심 사고는 문화적 결함이 아니라 환경이 만들어 낸 구조적 조건의 산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