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창고는 얼마나 크길래 자루 아구까지 꽉꽉 채운 눈 알갱이를 이렇게 많이도 보관하고 있다가 쏟아부었을까?
첫눈이 온다던 일기예보는 어긋나지 않고 예정대로 찾아들었다. 기상정보의 정확도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첫눈이니만큼 폭설이 내릴거라고는 예상 밖의 일이다.
서울을 기준으로 첫눈이 이렇게 많이 내린 것은 117년만이라고 한다.
이런 날이면 첫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뒤뜰 무 구덩이 속 첫눈의 뽀얀 속살 닮은 시원한 하얀 무가 생각난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김장까지 끝나고나면 아버지는 뒤뜰에 무 구덩이를 팠다.
그곳에 무를 모두 넣고 다시 흙으로 덮었다. 무를 꺼내는 통로를 만든 후 짚을 길쭉하게 둘둘 말아 그 입구를 막으면 무 구덩이가 완성된다. 짚을 둘둘 말아서 입구를 막은 짚 뭉치는 간편하게 통로의 덮개 역할도 했지만 지푸라기가 보온의 역할까지 더해서 무가 어는 것도 방지했다.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통로는 무가 나올 정도의 넓이로 만든다. 좁은 통로를 통해 무를 쉽게 꺼내는 방법으로 나무 손잡이에 긴 쇠꼬챙이 하나를 박는다. 그 쇠꼬챙이를 푹 찔러넣으면 뽀족한 날에 무가 꽂힌다. 입구 통로쪽으로 당겨서 꺼내면 어두컴컴한 곳에서 눈을 감고있던 하얀 무가 밖으로 딸려나온다. 흙의 보온성 덕분에 머리쪽에는 연초록 새순이 삐죽이 올라와 있다. 뿌리 쪽으로는 하얀 잔털이 뾰족뽀족 자라있다.
땅속에서 잠자다가 눈을 반쯤 뜬 하얀 무는 아삭하고 시원한 것이 지루한 겨울밤을 보내기에 좋은 간식이었다.
땅속은 포근해서 어떤 추위가 에워싸도 구덩이 속의 무는 얼지않았다. 배추뿌리도 무와 함께 나란히 저장을 했는데 아버지는 특히 그 배추뿌리가 맛있다고 했다. 고구마, 무, 배추뿌리를 깎아먹으며 눈 내리는 겨울밤은 달콤 쌉싸름하게 익어갔다.
첫눈이 폭설로 내린 날 첫눈의 속살 닮은 하얀 무를 깎아먹던 유년의 겨울밤이 아련하게 오버랩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