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넌

by 김정식

1998년




1998년 3월, 나의 첫 대학 시절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대부분 학생들이 그렇듯,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일이나 적성에 맞는 길을 따라 대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성적에 맞춰 진학했을 뿐이었다.

이 나라에서 성적은 곧 진로가 되고, 진로는 어느새 나의 직업으로 굳어져버린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 1학년의 봄, 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술을 마셔도, 늦게 들어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수업에 빠져도 괜찮았고, 자유가 내 손안에 있었다.


누군가의 과제를 대신해줄 수도, 출석을 대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험만큼은 안 됐다.

시험은 결국 내가 직접 쳐야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마저도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지금 그때 나의 방탕한 대학 시절을 고백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어디로 갈지 모르고 마구 뛰어다니던, 그 1학년 시절을 잠시 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만큼 무엇이 필요한지도 몰랐던 때였다.

시간은 많았지만 방향은 없었고, 그냥 매일매일 일상들이 흘러 갔다.


그래도 선배, 후배, 동기들과의 만남, 이야기, 그리고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은 아직도 마음 한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제는 사진 속 모습들이 조금씩 바래지고 흘러가지만,

그 사진 속 얼굴들처럼 내 기억 속 그들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5월

오늘도 어색하지만 학과방 문을 열고 들어간다.

과의 특성상 여학생 비율이 훨씬 높았다.

그 사실을 보여주듯, 학과방에는 언제나 여자 선배들이 가득했다.


“후배님~ 오늘도 편지 왔어요.”

누군가 웃으며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누가, 대체 누가 이렇게 매일 편지를 두고 가는 걸까.


동기들보다 세 살이 많았던 나는, 나이를 이유로 선배들에게 ‘후배님’이라 불렸다.

지금 같으면 친구 사이일 텐데,

그땐 ‘선배님’, ‘후배님’이 엄연한 관계의 선이었다.


나는 어디서나 주목받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이상하게도 관심이 집중됐다.

나이도, ‘후배님’이란 호칭도 어색했지만,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매일같이 내 앞으로 오는 편지였다.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시간에

누군가 편지를 꽂아두고 가곤 했다.

‘이러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열흘, 스무 날, 삼십 날… 편지는 멈추지 않았다.



동기 40여 명 중 남자는 단 7명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일곱 명은 늘 붙어 다녔다.

밥도 같이 먹고, 수업도 같이 듣고,

저녁이면 돼지국밥에 소주, 막창에 소주, 대패삼겹살에 소주.

하루의 끝은 언제나 술자리였다.


그렇게 매일 어울리다 보니, 우연히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이름하여 ‘칠부회’.

소주 한 병을 일곱 잔에 딱 맞게 ‘칠 부(七部)’씩 따르면 정확히 한 병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이름의 유래만큼 단순하고, 우리답게 웃기게 시작된 모임이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시작이 이렇게 오래 갈 줄 누가 알았을까.

잠깐 경고 하나 남기고 싶다.

지금 누군가와 ‘한 번 해보자’며 모임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그 시작이 30년을 이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길 바란다.


우리 칠부회는 그렇게 만들어져

지금까지 거의 30년을 함께하고 있다.

얼마 전엔 우리 집에서 그때처럼 소주를 따르고, 같은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를 놀리며 웃었다.


이상하게도 매번 같은 이야기인데,

30년을 반복해도 여전히

재미있고 유쾌하다.


우리 칠부에는 여기에서 잠깐 접어두고 다시 편지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다시 그 시절의 편지 사건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편지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기보다는

점점 그 편지 자체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작고 예쁜 봉투, 고운 편지지,

가끔은 봉투 없이 접힌 채 꽂혀 있던 편지도 있었다.

짧은 안부 인사,

“오늘 하루도 화이팅!”이라는 응원,

그리고 어딘가 따뜻한 한 줄 문장들.


처음엔 내용이 궁금해서 읽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보다는 편지를 받는 일 자체가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아침마다 학과방 문을 열며,

‘오늘도 있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부담스럽던 편지는 어느새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작은 의식이 되었고,

언제 그 편지가 멈출지 모른다는

조금의 아쉬움과 불안감이 생겼다.

그리고…

‘대체 누굴까?’ 하는

은근한 설렘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동기들은

내 시선에서는 아직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윤종신 노래 가사처럼 교복을 벗고 처음으로 만났던 너…

노래 가사 속 그 한 줄처럼

아직 교복이 더 잘 어울리는 녀석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항상 예의 바르게,

“오빠,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넸다.

선배들에게보다 더 깍듯하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말투가 편해졌다.

말로는 여전히 “오빠”라 불렀지만,

이제는 그냥 친구처럼 툭툭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마냥 즐겁기만 했던 대학 생활에도

어느새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아무런 준비가 어떤 나에게 고민 끝에 항상 강의실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던 동기 여학생에게 용기 내어 노트를 빌렸다.


마음씨 좋은 동기는

아무 말 없이 선뜻 노트를 내밀었다.

복사를 해서 시험 준비를 해보지만,

공부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놀고 마시며 보낸 시간이

시험 앞에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 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음 시험엔 좀 자중해야겠다.”

아주 작지만, 그래도 변화의 싹 같은 마음이었다.



대학생활의 꽃, 축제


대학생활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축제가 아니던가.

교수님도 그날만큼은 수업 제끼는 걸 허용해 주시니, 모두가 신이 났다.


주막을 설치하고,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다들 열심히 준비하는데 나는 빗방울로 일어났다.

“아어르신은 뒤에 가서 쉬세요~” ㅋㅋㅋ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는 참 어렸다.


생각보다 동기들은 준비를 철저히, 그리고 정말 재미있게 해냈다.

덕분에 나는 배려받는 ‘어르신’으로 편하게 앉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주막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손님을 불러주는 것뿐.

여기저기 친구들을 불러 모아 “야, 우리 주막 와서 먹고 가!”

먹이고 보내고, 또 먹이고 보내고.


생각보다 맛도 괜찮았다.

다들 옷소매 걷고 처음으로 만든 요리였을 텐데, 꽤 근사했다.

MSG의 승리가 아니었나 싶지만… 그래도 그 맛, 참 좋았다.



편지 100통의 끝에서

나의 대학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고, 더 신날 여름방학을 맞이할 준비로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내게는 ‘편지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매주 우편함에 꽂혀 있던 익명의 편지.

그 수가 어느덧 99통이 되었을 때,

백 번째 편지가 올 차례의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편지는 없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 꼽혀 있던 편지가 사라지고,

텅 빈 공간만이 나를 맞이했다.


그 하루는 유난히 길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과방에 들러도,

점심을 먹고 돌아와도 그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편지의 주인공 생각으로 가득했다.


별다른 연락도 없고,

묘한 불안감과 허전함이 함께 밀려왔다.

결국, 오늘은 편지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길.

묘하게 낯익은 정류장에 내릴 즈음,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태더후배님~!”


익숙한 목소리였다.

뒤돌아보니, 3학년 선배가 서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의 눈빛과 마주친 순간,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


편지의 주인공은 바로 그 선배였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나를 챙겨주고,

언제나 반갑게 인사해주던 그 선배.

그녀는 3개월 동안,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편지에 담아 보냈던 것이다.


그날 이후,

‘후배님’이라 부르던 말은 사라지고

우리의 관계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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