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건 인정하자
복무점검에 걸렸다.
기분이 참 찝찝하다.
며칠 전부터 복무점검 기간에 대한 공지가 있었고 나름 꼼꼼히 체크하고 신경 썼는데 순간 방심한 결과다.
벤저민 버튼이라도 되어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능력이라도 갖게 해달라고 신께 간절히 빌어보고 싶다.
점검팀이 출동하기 이틀 전 퇴근하려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순간 컴퓨터 스위치를 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럴 때는 가만히 몇 분 전 상황을 복기하면서 그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딱' 하고 머릿속에 불이 켜지면서 내가 했던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 손이 스위치 세 개를 순서대로 껐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영 꺼림칙해서 사무실에 다시 올라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스위치는 얌전히 점멸되어 있었다.
그렇게 확인까지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는데 정작 그날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점검팀이 다음날 저녁에 들이닥친 거다.
지지리 운도 없었던 날이다.
복무점검에 한번 걸리면 여러 가지가 복잡해진다.
누군가에게 끌려가 훈계를 듣거나 또 다른 누군가가 나 대신 당직을 서거나.
그것이 두 번째라면 일은 더욱더 심각해진다.
첫 번째인 4년 전쯤 나는 마우스 패드 밑에 회사 프로그램 접속 아이디와 비번이 적힌 포스트잇을 넣어놨다가 적발되었다.
지독한 놈들이다 마우스 패드 밑까지 들춰보다니 완벽하다.
그때는 부서 자체적으로 시범 삼아 한 거라서 가볍게 주의를 듣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지금은 다른 부서로 가신 과장님께서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줘야 한다고 갑자기 무언가를 나한테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학창 시절에 반성문도 한번 써보지 않았던 나는 네이버를 검색해 가면서 경위서라는 것을 썼다.
하필이면 왜 나를 경각심의 본보기 대상으로 삼았냐 말이다.
그전에 걸렸던 직원들이 다분히 있던 터라 나는 좀 많이 억울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 해 연말 상을 받기로 되어있던 나 대신 다른 직원이 상을 받았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나는 상에 대한 욕심은 없다.
공부로든 뭐로든 특별히 받아본 적이 없는 고로 상은 그저 종이 조가리에 불과하고, 이름이 불려지고 단상에 올라가는 순간 연예인이나 범죄자도 아니면서 수많은 눈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싫었기에.
그런 이유로 수상목록에서 탈락되어 버린 나 스스로에게 약간의 자괴감이 잠깐 들었을 뿐이다.
그런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어릴 때 수없이 봐왔던 그 표어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출근하자마자 비보를 전해 듣게 되었다.
책상서랍도 잠그지 않은 채 6시 땡순이가 되어 잽싸게 내빼버린 거다.
그냥 닫으면 알아서 잠가지는 서랍으로 사비를 들여서라도 바꾸던지 해야지 원.
복도에서 마주친 과장님께 비굴할 정도로 진심을 다해 "죄송해요" 했더니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죠, 그럴 수 있죠" 하시면서 쿨 하게 넘어가셨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 건으로 서무과를 통해 과장님 실로 호출 명령이 내려왔다.
'아니 이게 뭔 일이래, 다음 주가 진짜니까 그때 조심하라고 하더니만, 까짓 거 경위서 한번 더 쓰거나 퇴사하라면 때는 이때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이 조직에서 하산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 맘껏 하면서 살겠습니다" 작정하고 들어갔다.
여러 명이 걸렸다고 들었는데 과장님 실에 아무도 없고 딸랑 나 혼자였다.
궁금하던 차에 과장님 왈, 다른 직원들이 걸린 것은 대수롭지 않은 거고 나랑 4층 직원 둘이 걸린 것이 큰 건이란다.
그렇게 과장님 하고 10여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파마를 했는지 원래 그런 건지 머리털이 쭈뼛쭈뼛한 4층 젊은 남자 직원이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는 억울하다며 한참을 떠들어댄다.
컴퓨터를 분명히 끄고 인증사진까지 찍어뒀는데 아침에 오니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나 어쨌다나.
컴퓨터가 지 혼자 심심해서 켜진 것도 아닐 텐데 참 요상한 일도 다 있다.
누군가 자기 컴퓨터를 켰거나 업그레이드가 되면서 자동으로 켜졌거나 했을 거라고 한참 동안 입에 거품을 문다.
스위치까지 꺼진 상태에서 컴퓨터가 벼락이라도 맞아서 리부팅이 되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그만 닥치고 '다음부터 조심할게요' 한마디만 해라 쫌 빨리 끝나게.
그건 그렇고 사진 찍는 직원은 이참에 사진작가로 데뷔라도 할양인지 요리조리 옮겨 다니면서 우리를 찍어댄다.
모델처럼 포즈라도 취해주고 싶은 것을 죄인행세라도 해야 하니 꾹 참았다.
이왕 사진까지 찍힌 거 어디에 내보낼 거면 이쁘게 뽀샵이라도 해서 실어주라.
내 잘못이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고 핑계도 댈 수 없다.
불편한 속 마음을 뒤집어서 달래 본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고 두 번 실수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대?'
'괜찮아, 더 실수해도 돼, 실수도 다 인생 공부야, 하지만 앞으로 한번 더 실수하면 너는 진짜 'ou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