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의 '멀고도 머~언' 사랑

일단 '고' 라도 합시다.

by 피노

요즘 조카는 한창 열애 중이다.

서른이 다 되도록 변변찮은 연애한번 안 했는지 못했는지 허구한 날 저랑 똑같이 생긴 친구들만 만나서 먹고 수다 떨고 여행 다니고 하는 것이 저러다 남자 친구가 생기기나 할까, 그 조카의 엄마인 언니와 나는 가끔씩 못마땅한 눈빛을 암묵적으로 교환하곤 했었다.


눈이 부시다 못해 멀 것처럼 이쁜 하늘이 펼쳐진 어느 날.

누군가를 만나기만 해도 사랑이 싹틀 것처럼 모든 만물의 씨앗이 소리 없이 움트기 시작한 그때.

"이모 들었어? 나 소개팅 나가" 전화를 해왔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막내 이모한테 얘기를 안 하고 있으려니 입이 근질근질했을 거다.

"저~엉말? 몰랐지!"

'모르긴 뭘 모르겠냐 이미 들어도 벌써 들었지, 너희 엄마와 나 사이에 너에 대한 비밀이 있간디?'

웃음이 풋 하고 나왔지만 꾹 참고, 밑밥을 깔아줘야 신나서 떠들 테니 "누군데? 누가 소개해주는 건데?"

하고 모르는 척 물었다.


방언이 터진 것처럼 신나서 말하더니 '바지를 입을까 스커트를 입을까? 밥을 먹을까 차를 마실까? 상대방이 이미 다 계획하고 있겠지?' 한참 동안 텐션을 올려댔다.

왕년에 소개팅깨나 했던 나로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편하게 만나봐라 괜히 실망하지 말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해줬다.

여러 번의 소개팅에서 실망만 하고 돌아온 후에 소개팅 말만 나와도 미간이 찌푸려지다가 결국엔 소개팅 트라우마까지 생겨버린 나처럼 될까 봐.

그래야 기대치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이 나와도 억지웃음으로 포장해 가면서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시게 되는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테니까.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곰돌이 상이긴 해"

어떤 날은,

"카톡으로 날리는 멘트는 제법 센스가 있는데 가끔 통화를 하면 재미도 없고 말도 잘못하는 것 같아"

다른 것에는 세상 느긋하기도 한 조카가 몇 번 보지도 않은 소개팅 남에게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하긴 거리가 가깝기나 해야 자주라도 보든 말든 할 텐데, 중국과 한국이 옆동네도 아니고.


"이모, 나 중국 간다, 이번에 가서 만나보면 내 마음을 확실히 알 것 같아"

그렇게 조카는 옆동네 놀러 가는 것처럼 쉽게 비행기 티켓을 끊고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요즘 젊은 애들의 마인드는 cool하다 못해 freezer 한 건지 내 조카가 좀 박력이 있는 건지.

생각하고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꽤나 내 삶을 크게 좌지우지했을 많은 것들을 어이없이 놓쳐버린 나로서는 그런 조카가 참 용기 있고 멋있어 보였다.

나의 삶에서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빨강종이 와 파랑종이 둘 중 무엇을 가질지를 고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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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날의 중국행이 헛되지는 않았던지 둘은 지금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롱디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항상 어리게만 보였던 조카가 감정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맡기고 결코 쉽지만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대견하기도 한 것이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였다면 저럴 수 있었을까?'


나와 남편이 즐겨보는 나는 ㅇㅇ라는 프로가 있는데 결혼을 원하는 남녀들이 만나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서로를 알아가다가 마음에 들면 선택을 한다는 구성으로 짜여 있다.

상대에게 좋은 감정이 싹터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장거리 연애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미리 포기해 버리고 결국은 매칭이 되지 않는 커플들이 종종 있다.

연애를 하면서 몸으로 체감되는 'Distance '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Distance' 가 꼭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좋은 감정으로 시작했지만 현실적인 부분을 넘어서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를 실제로 보기도 했다.

사람의 진가를 알아보려면 더 자주 보면서 더 많이 겪어보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있다.

그렇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우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에 나오는 여우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 여우는 포도를 먹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 해본 후 포기했으니까 말이다.


나는 그런 커플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일단 좀 만나봐라, 우리나라 어디든 4-5시간이면 다 간다'

사실 나와 남편도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장거리 연애를 한 케이스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기 때문에 설렘도 더 컸고 보고 싶은 마음을 꽁꽁 눌러놨기 때문에 더 많이 표현하고 그러다 보면 진솔한 상대방의 모습을 뜻하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이슈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모, ㅇㅇ 씨 지금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고 전화 왔다 ㅎㅎ".

조용한 사무실에 있어서 대답도 크게 못하는데 조카의 목소리는 50 데시벨 정도는 될 듯 활기찼다.

'응응' 대충 대답하며 얼른 의자에서 궁둥이를 일으켰다.

조카의 신나서 재잘대는 수다를 들어주려면 커피라도 한잔 뽑아서 자리 잡고 앉아야 할 듯하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조카의 마음에는 사랑의 빗줄기가 내리고 있을 터이니 그 빗줄기로 인해 오늘 하루 내 마음도 사랑으로 적셔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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