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차리자
'000님 대출하신 자료의 반납일입니다.
반납예정일 : 2025-12-07
도서목록 (책 3권)
1. 속죄 : 미나토 카나에 장편소설
2.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김영민
3.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 고수리 에세이
00 도서관 000-000-0000 '
조금 전 울린 카톡이 생각나서 핸드폰을 열어보니 3주 전 대출한 도서를 반납하라는 내용이었다.
원래 대출기간인 2주에 한 주를 더 연장한 3주의 마지막 날이 오늘이었다.
밖을 내다보니 앙상한 나뭇가지에 달린 마른 잎들이 흔들흔들 거리는 모양새가 꽤나 추워 보였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에게,
바람이나 쐴 겸 도서관에 가자고 말했다.
세 권의 책을 손에 들고나가려는 남편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작은 가방에 넣은 다음 남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5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햇살은 겨울 추위에 잔뜩 움츠린듯한 회색빛 건물들 위를 따사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햇살은 이상하리만치 영롱하고 맑다, 그래서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도 햇빛은 더 화사하게 빛난다.
연말이 되니 술집이며 식당이며 카페들로 평상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이 길은 더 복잡했다.
족발집, 치킨집, 호프집, 들이 즐비한 이 유흥 거리에 얼마 전에 인형 뽑기 가게 하나가 오픈하더니 몇 달 후 두 번째 가게가 문을 열었다.
지날 때마다 흘낏 바라본 그 안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중고생, 대학생, 주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계 앞에 앉거나 서거나 하며 인형 뽑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가게가 오픈준비를 하고 있을 때 유흥가 골목에 웬 인형 뽑기 가게인가 하며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돈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의 눈썰미는 다른가 보다.
무심코 지나쳤던 그 거리를 자세히 살펴보니 술집들 못지않게 많은 학원들이 건물들의 2-3층에 빽빽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수업을 끝내고 그것도 모자라 방과 후 학원 수업까지 들으며 공부에 매진했던 아이들의 하루를 인형 뽑기 라는 '보상심리'로 마무리하게 만들려는 작전이 잘 먹혀든 셈이다.
역시나 사업수완이 좋은 사람들의 머릿속은 나 같은 사람은 따라갈 수 없는 모양이다.
예상이 적중했는지 가끔 늦은 시간임에도 어린아이들이 책가방을 등 뒤에 매단 채로 낮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손가락을 좌우로 '탁 탁' 절도 있게 튕겨대며 움직이고 있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두 개의 인형이 달랑거리는 가방을 메고 활짝 웃으며 그 안에서 나왔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남편이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고개를 들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봤다.
햇살대신 조명빛으로 바뀐 사방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나는 멍하니 서서 도서관을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에 잠깐 서 있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나 마음이 갑자기 쓸쓸해졌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도서관 앞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니 쓸쓸함의 깊이가 조금 더해졌다.
다시 되짚어 돌아가는 길,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우고 있었고 햇빛이 사라진 골목에는 황량하고 시린 바람이 무심결에 옷깃을 여미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드디어 우리 아파트가 보이는 신호등 앞에 섰다.
왠지 조금 추워 보이는 남편을 바라보다가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남편도 순간 허전한 낌새를 알아챘는지 얼른 어깨에 손을 댔다.
"엇 가방!"
어깨에 매여있어야 할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말함과 동시에 남편과 나는 왔던 길을 향해 뒤돌아섰다.
방금 걸었던 길임에도 불과하고 확실한 동선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쯤에서 저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나?' 생각 없이 무심코 걸었던 탓이리라.
바닥을 살피며 정신없이 걸었다.
도서관 쪽으로 갈수록 유흥가가 줄어든 탓에 상가에서 비치는 불빛도 점점 없어졌다.
마음속으로는 '그만 가고 포기하자' 하면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는 카렌의 분홍신처럼 나도 왠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남편은 이미 포기하고 저만치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 안에 돈도 들어있지 않은데 그냥 떨어뜨리고 가지 그걸 왜 주워갔대?"
하는 말에 남편왈,
"애들이 좋아하는 이쁜 키링 인형이 가방에 달려있잖아" 그런다.
아, 그렇지 키링, 증거도 없으면서 애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 소리를 합리적 의심이랍시고 어른 둘이서 하고 있다.
내 가방에는 언젠가 선물로 받은 꽤나 앙증맞고 이쁜 인형이 하나 달려있었다.
"설마, 그 인형 때문에 가방을 가져갔겠어?"
유럽에서 많은 소매치기들을 보았던 나는 우리나라 사람 들은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다고 은근 자부하고 또 으스댔었다.
얼마 전 외국인 직원이 한국에서는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두고 잠깐 자리를 비워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다고 하길래 그게 우리의 민족성이라며 고개를 한껏 치켜세웠는데.
잃어버린 가방보다 왠지 모를 배신감에 속 이 더 상했다.
이상하게도 그런 배신감은 다수의 사람들을 향했다.
어느 한 사람을 특정할 수 없는 나는 그 거리를 걷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배신의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쩐지 가방을 안 가져가고 싶더라."
나를 탓하는 듯한 남편에게 한참을 우겨서 가방을 메게 한 나의 행동이 생각나서 '욱' 하려다 가만히 있었다.
'본인이 잃어버렸으니 방어기제가 작용하겠지' 싶어,
"괜찮아, 비싼 가방도 아니고 그동안 많이 써먹었으니까 본전 뽑고도 남았어."
남편이 이 일을 계기로 도서관 갈 때 안 따라가겠다고 할까 봐 슬쩍 위로했다.
도서관까지 거의 두 번 왕복을 한 탓인지 우리 둘은 한참을 힘없이 앉아있다가 둘이 서로 눈이 마주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늘 밤 잠은 잘 자겠다'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