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잘 살아요
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퇴직 후 한가롭게 여가생활? 을 즐기고 있는 대신 허구한 날 밭에 나갈 구실만 만들어대는 오빠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어 오빠, 웬일이야?"
"나 오늘 네 시아버님 만났다?"
갑자기 무슨 자다 봉창 뜯는 소린가 싶어,
"오빠가 우리 아버님을 갑자기 왜 만나?"
사연을 들어보니 이러했다.
오빠는 오랜만에 시간이 좀 나서 체육센터에 운동을 하러 갔다.
이른 오후라 그런지 나이 든 노인들이 많았고 젊은 사람축에 끼인 오빠는,
'기구도 모자라고 다음부터는 좀 늦은 시간에 와야겠네' 하며 멀찍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막 운동을 시작할 참이었다.
그때 45도 근방에서 비스듬하게 어떤 노인이 자꾸만 오빠 앞으로 다가왔다 뭐라고 중얼대면서.
처음에 오빠는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 필요한 게 있나 싶어 노인 쪽으로 걸음을 살짝 옮겼다.
"저 혹시... 00 이 오빠 아니세요?"
오빠는 갑자기 내 이름이 노인입에서 나오니 깜짝 놀라 이게 뭔 상황인가 싶다가, 머릿속으로 꼬여만 가는 회로를 가동하다가....... 아차! 이 분이 우리 막내 시아버님이구나, 했단다.
"아이고 사둔어른 죄송합니다 몰라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와 아버님은 내 결혼 후 두어 번 만난 것이 전부니 기억이 안나는 것이 당연했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고 나서 아버님은 오빠에게,
우리 00 (남편) 이 성격이 까칠해서 00 (나)가 맘고생 깨나 할 거다.
성격이 0 형 (오해하지 마시길)이라 욱 하는 성질이 있다, 그거 참아주느라고 00가 힘들 거다 등등.
"에이 저희 집도 0형들이 많은데요 뭐, 저도 0형이고요."
"그리고 둘이 서로 잘 사니까 문제 될 거 없죠 염려 마세요."
아버님은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난 오빠한테 당신 맘에 들지 않는 남편 흉을 실컷 보았다.
며느리를 추켜세우려고 오빠에게 좀 더 과장했겠지 싶었다.
그러면서도 당신과 아들의 성격이 똑같아서 만나는 것을 최소화하고 만나더라도 얼굴 마주치고 얘기 나누는 것을 심히 삼가고 있으니 아버님의 노파심도 이해가 가긴 했다.
며칠 후 오빠가 또 전화를 했다.
"나 오늘 너희 집 근처로 볼일 보러 가니 같이 저녁이나 먹자. 너 먹고 싶은 걸로 골라놔."
한 시간이나 걸리는 우리 집 근처까지 무슨 볼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얼마 전부터 먹고 싶던 돼지갈비가 생각나 냉큼 말했다.
식당에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오빠와 올케언니는 주문한 갈비가 나오자 없는 집 자식 오랜만에 고깃집에 몸 보신 시키러 데리고 온 것 마냥 우리 앞으로 갈비를 밀었다.
열심히 뼈에 붙은 고기를 뜯고 있는데 오빠가 슬쩍 남편에게 아버님 만났다는 말을 꺼낸다.
"내가 이미 말 다했어, 오빠가 아버님 만났고 아버님이 0 서방(남편) 욕 엄청 했다고 ㅋㅋ.
"너희들이 볼 때마다 사이도 좋고 재미있게 사니까 아무 걱정 마시라고 내가 말했다."
세상 쿨 한 척하는 오빠가 남편을 보며 은근히 칭찬한다.
"자네도 아버님한테 좀 살갑게 해 드려, 자식이 부모한테 맞춰줘야지."
듣는 둥 마는 둥 열심히 고기를 자르느라 정신이 없는 남편을 팔꿈치로 '툭' 찔렀다.
"그래야죠." 고기를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건성으로 한마디 한다.
더 이상 얘기하면 꼰대같이 보일까 봐 오빠는 입을 다물고 말없이 공기 밥 한 그릇을 남편 앞으로 내민다.
오빠는 그날 아버님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우리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오빠가 퇴직한 후로 가끔 만나 밥 먹고 차 마시고 하면서 우리와 오빠네는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장을 봐서 시댁에 갈 때 오빠집에 들르면 가끔 일을 하러 가는 언니대신 혼자서 국을 끓이고 반찬을 꺼내 먹는 오빠를 본다.
마음 한편이 짠해질 때도 있으면서 돌아가신 아빠의 얼굴이 떠오를 때도 있다.
아빠도 엄마 없을 때 저렇게 혼자 밥상을 차리고 온기 없는 밥을 드셨는데.
집은 리모델링을 했지만 터는 여전하기에 나는 엄마 아빠가 생활했던 공간을 가늠해 보며 가끔 그 자리를 서성대기도 한다.
아스라한 기억 속에 엄마 곁에 앉아 티브이를 보시던 아빠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나에게 익숙한 아빠의 모습은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이다.
심지어 꿈에서도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다정하게 많이 웃어주지 못해서, 살가운 막내딸이 아니었던 내가 미안해서 아빠를 바로 마주 볼 수 없기에 나는 아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나 보다.
나이가 들어가는 오빠의 얼굴과 뒷모습에서도 영락없는 아빠의 눈매와 이마의 주름과 구부정한 등이 투영된다.
함께 마주 앉아 얘기하고 웃고 있는 소중한 이 시간이 나를 무척이나 보드라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오빠, 앞으로도 맛있는 밥이나 많이 사줘."
내 말에,
"당연하지 오빠가 가진 게 돈 밖에 더 있냐? 큼 큼."
살짝 우쭐댈 때 나오는 오빠 특유의 헛기침 소리이다.
실컷 먹은 갈비 덕분인지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진 남편도 나도 오빠의 헛기침 소리에 마주 보고 웃었다.
우리를 만나고 돌아가는 오빠의 발걸음은 한 층 가벼워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