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걷기

나를 만나는 시간

by 피노

매서운 찬바람이 2주째 기승을 부리는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냉기 가득한 대기의 혹독함이 섣부른 발걸음을 저지하고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갖게 되는 긴장감, 일로인한 스트레스, 사람들과 관계 맺기의 어려움 등 을 산책하면서 풀어나가는 나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시간이 되고 있다.


갈대숲에 부는 바람, 물 위에 떠있는 새들, 엉덩이를 이쪽저쪽 흔들며 걸어가는 애완견, 재잘대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자전거를 타고 날렵하게 내 옆을 스치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자랑하는 근육질의 남자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의 모든 것들이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삶은 어려움 속에서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과, 내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구나 라는 가벼운 답을 내어놓게 만든다.

산책은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나에게 일대일 무상으로 심화수업을 시켜주는 교육이며 그 시간들은 어느새 내 안에 두터이 쌓이게 되어 나이테 같은 것이 되어간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대부분의 겨울 동안엔 간단하게 걷기라도 해야겠다 싶어 헬스장에 간다.

러닝머신이 8대, 양 끝쪽이 비어있으면 그 자리를 택한다.

요즘은 뛰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그나마 가장자리에서 걸어야 소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귀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가운데 자리를 택해야 하는 날에 양 옆쪽 두 사람이 뛰기 시작하면 나는 온전히 그 소음을 무방비상태로 받아들여야 한다.

크게 틀어놓은 음악소리 와 머신 컨베이어에 서 반복적으로 울리는 둔탁한 사람들의 뛰는 발소리, 소리보다 조용히 눈으로 사색하는 나의 걷기 스타일과는 정말 맞지 않는다.

나의 성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불만은 없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조용함이 좋았다.

솔직하게는 타격감 없는 나의 내면의 무심함을 꿈궈왔다.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소음의 데시벨에 따라 나의 감정이 소리 없이 요동치는 아우성이 두려웠다

던져진 작은 조약돌 하나가 잔잔한 물 위에 오랫동안 큰 파장을 일으키며 머무는 것을 알기에 내 마음의 고요에 낯선 돌멩이 하나라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큰 파고를 견디고 인내하고 버텨내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모든 소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래서 더욱 철저히 나를 숨기고 스스로를 조용히 소외시키기 위해 애써왔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된 감정들을 유지할 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으로부터도 자극받는 것이 싫어 자꾸만 안으로 더 깊게 침잠하는 나만의 안락한 동굴을 발견하기 위해 부딪히고 일어서고 오랜 시간 동안 고군분투 해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산책이다.

신산한 바람, 공기, 자연의 내음 등 은 내가 아직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가보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가지 못한 길이거나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미로 안에서 , 하지만 결코 두렵지 않고 오히려 기대로 인한 벅차오름이 가득한 희열의 순간으로 나를 이끌어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내일을 살 에너지를 보충하고 때로는 오랜 시간 붙잡고 있었던 생각의 불순물들을 정돈하여 깨끗하게 정제시키기도 한다.


마음을 정돈한다는 것.

허공에 부유하는 많은 물질들처럼 마음 안에 떠도는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을 한 곳으로 온전하게 모아 비로소 한 덩어리의 실체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실체가 없는 모든 것 들은 그저 어지럽게 떠다니다가 어느 날 문득 사라져 버릴 허상의 것 들이니까.


장석주 시인은 '고독의 권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거머쥔 행운들 중 으뜸이라고'


오롯이 나를 만나는 시간은 때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심약한 자아와, 용기 없는 본성과, 당당하지 못해 움츠려든 가냘픈 심성을 마주하는 일이지만 그런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측은한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는, 나에게만 허락된 꾸며지지 않은 시간들인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산책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거친 삶에 맞설 수 있는 나에 대한 기대이고 희망이다.




작가의 이전글오빠의 갈비맛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