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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사초 Jul 26. 2023

# 경제적으로 자유로운데 일을 한다고?

가치에 따른 일의 선택

경제적 자유로 본업에서 은퇴했지만, 부업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운데 일을 왜 하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금전적 보상을 제외하더라도 일 자체가 주는 긍정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몰입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진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책에는 일이 가진 역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은 우리에게 퍽 묘한 경험을 안긴다. 가장 강렬하고 만족스러운 순간을 일에서 경험하고 자부심과 자기 정체성 또한 그것에서 얻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일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고 드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래서 우리는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도 일의 뿌리 깊은 이중성 앞에서 고민하고 있다. 일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일을 하는 동안엔 거기에서 벗어나고픈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다. '


우리 삶에 일이 중요한 부분임을 알면서도 정작 일을 하는 동안에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말이 정곡을 찌른다. 나 역시 공무원으로 15년간 근무하면서 그 '뿌리 깊은 이중성' 앞에서 늘 고민했기 때문이다. 일 처리에 만족하기도 하고, 그 일이 좋아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찾아서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적성과 잘 맞는 그 일을 천직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만 하면 퇴근시간이 오기를 기다렸고, '빨리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단 한 해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본업으로서의 일을 그만 두면 마침내 일의 역설에서 해방될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몰입이나 성취, 만족감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을 대체한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새로운 일을 찾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망설이기도 했지만, 나이가 드니 새로운 일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내 입맛에 맞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다. 알바의 대부분은 하루 8시간 근무였다. 하지만 나는 돈 때문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일로 채울 생각이 없다. 해가 뜨면 출근하고, 해가 지면 퇴근하는 삶은 이제껏 충분히 겪었다. 이제는 하루의 태양이 남이 아닌 나를 위해 빛나고,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시를 더 자주 만나는 하루를 살고 싶었다. 그리고 적은 시간 일해야 일의 역설로 고민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떤 삶으로 하루의 시간을 채워야 할 것인가에 영감을 준 이가 있다. 바로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발적으로 시골에 들어가 살았다. 거기서 직접 집을 짓고, 땅을 갈며, 식량을 생산했다. 단풍나무 수액을 채취해 시럽을 만들어 파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조화로운 삶을 위해 하루 일과를 4시간씩 나누었는데, 생계 노동 4시간, 글쓰기와 같은 전문 활동 4시간, 그리고 시민으로의 책임과 의무를 위한 활동 4시간이다.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경제에 순응하며 살고 있지만, 시대가 달라진 만큼 삶의 방식이 같을 순 없다. 내 나름의 방식으로 삶의 조화를 추구하며, 깨어있는 시민으로 살아갈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네들처럼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긴 어렵지만, 나름의 대안은 가능하다. 땅을 갈고 식량을 생산하지 않더라도, 땅을 갈고 식량을 생각하는 지역 주민의 상품(로컬푸드)을 인근 5일장이나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일도 마찬가지다. 4시간씩 균등 배분하지는 않더라도, 하루의 작은 시간만큼 일하면서 그 일이 주는 가치에 감사하며 살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나의 성장을 위한 독서나 글쓰기에, 그리고 일 때문에 늘 뒤로 미루기만 했던 가족과의 시간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 수 있다.


예전에는 남들이 인정해 주는 직장을 다니거나, 시간당 많은 돈을 주는 일이 최고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대부분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많은 급여를 받는 만큼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야 한다.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뒤로 미루어야 하고, 내 가족과 보낼 시간도 가끔은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사회적 인정도 금전적 보상도 내겐 일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급여가 적더라도 마음 편한 일이나 시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일을 찾고 또 찾았다.    

   





그래서 찾은 일이 새벽 배송이다. 새벽 4시 반부터 6시까지 1시간 반 정도 인근 아파트에서 물건을 배송하는 일이다. 처음엔 배송할 아파트 단지의 구조를 알지 못해 서툴렀다. 하지만 일주일만 지나니 내 집 다니듯 익숙해졌다. 이제는 일이라기보다 운동처럼 생각한다. 정기권을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피트니스 같은 아파트에 나가 아령이나 역기 같은 상품을 들었다 놨다 수 십 세트 반복한다. 아파트 단지를 워킹머신 삼아 때론 걸으며 때론 달리고 있다.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 다이애나 로렌스 -


배송 일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시간이다. 안 그래도 새벽시간에 조깅을 하고 있었는데, 조깅을 대신할 만한 일이 눈에 띄었다. 새벽에 나가 한 시간 정도 운동 같은 일을 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을 지금처럼 보낼 수 있다. 분명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아내와 삼시 세끼를 함께 먹는다. 하루 두 번, 오전과 오후 반려견과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한다. 라디오의 클래식 프로그램을 언제든 듣는다. 정원에 나가 식구나 다름없는 식물들이 어제보다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하고, 목마른 식구들에게 물을 준다. 점심 후 식곤증에 졸리면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인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생각을 정리하며, 쓸거리를 고민한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떠올린다. 다이애나 로렌스의 말처럼 나는 지금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짧은 시간 일하는 새벽 배송이 금전적 여유를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본업에서 은퇴한 내게 '가장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만큼은 확실하게 보장해 준다. 물론 소소하지만 용돈 같은 급여도 준다. 자기 정체성까지는 아니지만,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나 심리적 안정감에 일의 역설을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보람도 얻는다. 가끔 배송 때 마주치는 주민들의 감사 인사나 현관문에 살짝 붙여둔 감사의 글귀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나도 나의 한 걸음에 누군가의 아침 밥상이 든든하게 차려질 것을 상상하며 부지런히 걷게 된다.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배송일이 좋다고 홍보하거나, 이 일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면 자신의 가치에 따라 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파이어 #FIRE #경제적자유 #조기은퇴 #새벽배송 #일의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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