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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사초 Jul 15. 2023

# 머리를 짧게 깎는 이유

시간적 경제적 자유인의 일상

시간적 경제적 자유인이 되고서 아내에게 부탁해 바리캉을 구입했다. 주문한 바리캉이 온 이후 지금까지(5년 정도 되었다) 한 번도 미용실을 간 적이 없다. 본업에서 은퇴하니 '미용(美容)'의 사전적 뜻처럼 '얼굴이나 머리를 아름답게 매만'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필요가 없으니 굳이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울을 보며 바리캉으로 셀프 커팅을 하기도 하고, (영화 '아저씨'의 주연 배우를 따라한 건 절대 아니지만, 이왕이면 그런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나 주기를 바란 건 사실이다.) 미용 자격증이 없는 아내에게 머리를 맡기기도 했다. 처음엔 머리를 맡기면서 내심 걱정이 앞섰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불안과 걱정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내는 익숙한 손으로 바리캉을 쥐고서 전문 헤어 디자이너가 된 듯 신중하면서도 능숙하게 머리를 깎는다. 아내의 새로운 도전이 때론 기대 이상의 결과를, 때론 기대 이하의 참사를 낳기도 했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내게는 늘 기대 이상의 만족이다. 어떤 결과든 셀프 커팅보다는 분명 나을 것이고, 미용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깎아주려는 아내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군입대를 하는 것도 아닌데, 꼭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할 이유는 없다. 생각해 보면 남중과 남고를 다니면서 누구 못지않게 짧은 스포츠머리를 싫어했다. 그래서 교문을 지키는 두발 단속 선생님을 피해 담을 넘어 도망치기도 했다. 군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의 스타일을 존중하거나 두상에 맞춘 헤어스타일까지 바란 건 아니지만, 바리캉의 mm 규격에 내 머리를 맞춰야 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빡빡 밀린 짧은 머리를 보이기 싫어 휴가 나올 때도 늘 사제모자를 챙겨 쓰고 다녔다. 그런 내가 이렇게 스스로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다닐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짧은 머리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다. 학생이라면, 군인이라면 당연하다는 듯 짧은 머리를 강요하는 분위기나 관습, 그리고 그런 강요를 따르지 않으면 강제로 머리를 잘라버리는 관행에 대한 반감 내지 저항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면, 타인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면 결코 좋게 받아들여질 수 없기 마련이다. 어른이 된 나의 짧은 머리는 학생이나 군인 시절처럼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결과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짧은 머리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머리를 짧게 깎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확인해야 했다. 세련되고 멋진 스타일을 추구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미용실을 찾았다. 직모인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떡져 눕는 것이 싫어 펌을 한 적도 많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두세 주만 지나면 어김없이 옆머리와 뒷머리가 삐쭉 고개를 들어 다시 미용실을 방문할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잦은 미용실 방문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겐 특히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확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공무원으로서 늘 사람들과 대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빡빡머리가 야기할 오해나 문제가 걱정되어, 나 스스로 그런 머리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본업에서 은퇴한 지금, 나는 더 이상 나의 짧은 머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또한 내 짧은 머리를 향한 타인의 시선이나 눈치에 나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용기 있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기에, 내 짧은 머리는 내 자유로움의 표상이다.

    



가진 물건이 많아 스스로 미니멀리스트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미니멀이라 하면 보통 가지고 있는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물건의 미니멀보다 중요한 것이 삶의 미니멀이다. 그래서 단순하고 소소하게 일상을 산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매일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한다. 정원의 식물을 살피고 돌본다. 책을 읽고, 일기나 브런치 글을 쓴다. 아내와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유튜브로 좋아하는 음악을 보거나, 노트북으로 테니스를 시청한다. 이것이 전부다.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이지만, 이런 단순하고 소소한 일상을 지키는 것이 나에겐 가장 특별한 삶이다.   

이젠 가고 싶지 않은 모임은 가지 않는다. 원활한 직장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회식도 없다. 승진을 위해 눈치를 봐야 할 상사도 없다. 성과를 내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내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단지 나 자신과 내게 필요한 관계에 더 집중할 뿐이다. 남들에게 보이는 내 모습보다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에 더 신경 쓰고,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하루의 루틴이 이렇게 단순해진 것도, 불필요한 모임을 만들지 않는 것도, 그리고 머리를 짧게 자른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사족 -

바리캉 ; 머리를 깎는 기구. 주로 짧은 머리를 자를 때 쓰이며, 빗 모양으로 생긴 두 개의 날을 겹쳐서 만든다. 프랑스의 이발 용구 제조 회사인 '바리캉 에 마르 사(Barriquand et Marre 社)'에서 온 일본식 조어.


맞춤법 검사를 실행하니, '바리캉'을 '이발기'로 바꾸라 한다. 일본식 표기보다는 순화된 우리말 표기를 따라야 할 것 같아 모두 바꾸었다. 그리고 글을 다시 읽는데, 아무리 읽어도 이발기로는 바리캉의 느낌이 살지 않았다. 일본식 표기에 대한 반감은 있지만, 바리캉을 입으로 내뱉을 때의 입맛(?)과 그 단어에 오랫동안 묻어온 추억까지는 바꿀 수가 없어 사용하는 것이니 널리 이해 바란다.




#파이어 #FIRE #경제적자유 #조기은퇴 #바리캉 #짧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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