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사초 Jun 27. 2023

# 시간적 경제적 자유인이 꾸는 꿈

feat. 심야식당

오래전 인상 깊게 본 일본 영화가 있다. 바로 '심야 식당'이다. 도쿄의 한 외진 골목에서 심야 식당을 운영하는 마스터, 고바야시 카오루. 밤 12시에 오픈하는 이 식당의 메뉴는 오직 한 가지이지만, 마스터는 찾아오는 손님이 원하면 어떤 음식이든 만들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마스터의 손을 거쳐 손님들에게 나가는 맛깔스러운 음식도 볼거리이지만, 영화는 먹방보다 마스터와 손님 사이의 관계에 더 눈길이 간다. 식당을 찾아온 손님들은 마치 심리상담사에게 상담을 받듯 저마다의 고민과 사연을 마스터에게 쏟아낸다. 마스터는 손님들의 이야기에 증상을 진단하거나 처방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들어주고, 손님들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따뜻한 음식을 내어줄 뿐이다.


    

심야 식당의 마스터처럼 식당을 해보겠단 생각을 품은 적은 없다. 식당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알기도 하거니와, 식당을 할 만한 음식 솜씨도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식당을 운영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음식을 해줄 수는 있다. 나는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가끔 나를 찾아오는 이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소박하게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다행히 은퇴 후 삼시 세끼를 직접 해 먹으며, 요리 실력이 조금 늘었다. 무얼 먹을까 고민한 적은 있어도, 세끼를 준비하는 일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내 정체성이란 생각과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내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직접 해 먹는 재미와 건강함을 알기 때문이다. 새로운 메뉴에 도전할 때마다 맛있게 먹어주며 연신 물개박수로 칭찬해 주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심야식당의 마스터는 정해진 메뉴 이외의 주문도 받아주지만, 나는 지인들의 기호나 취향을 묻지 않는다. 다만 지인이 왔을 때 냉장고 있는 재료를 생각하고, 그 한정된 재료로 내가 할 수 있는 음식을 고민할 뿐이다.

오래 알고 지낸 이에게 해 주고 싶은 메뉴도 미리 정해 두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일에 몸도 마음도 지친 친구가 있다. 대출이 많아 휴일인 일요일조차 마음 놓고 쉬지 못한다.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다행이지만, 빚과 일에 치인 삶은 쳇바퀴처럼 그대로이다. 쌀쌀해진 계절에 그 친구가 찾아오면 황탯국을 끓일 것이다. 미리 손질해 둔 황태를 가볍게 씻어 간을 한 후, 들기름으로 충분히 볶는다. 그리고 준비한 쌀뜨물을 붓고 오래 뭉근히 끓인다. 갓 지은 흰밥과 뽀얗게 우러난 황탯국 한 그릇으로, 빚과 일에 시달려 차가워진 속을 뜨끈하게 달래주고 싶다.


평소 더위를 많이 타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하는 친구에게는 콩국수를 대접하고 싶다. 전통 방식으로 면을 뽑아 자연 건조한 국수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늘 먹는 양이 많은 친구이기에 국수는 넉넉하게 1.5인분이나 2인분을 삶는다. 삶은 면 위에 재래시장 두부 전문점에서 사 온 콩물을 넉넉하게 붓는다. 고명으로는 채 썬 오이와 통깨, 그리고 달걀 반쪽을 올린다.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수를 먹으면서도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칠 친구의 모습이 벌써 눈앞에 선하다.



따뜻한 한 끼는 오늘의 위로이고, 내일을 살아갈 힘이다.



이 브런치가 나에겐 심야식당과 마찬가지다. 손님의 입맛에 맞는 글이나 솜씨가 맛깔난 글은 아니지만, 일부러 찾아온 글손님께 언제든 따뜻한 글밥 한 끼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어 #FIRE #경제적자유 #조기은퇴 #심야식당 #dream’scometrue


이전 13화 # 은행의 예금자 보호는 예금자를 위한 것일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